과학연구

가장 위대한 어머니품

 2019.5.15.

우리 나라에는 20세기 50~60년대에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민족대이동이라는 력사적사변속에서 일제식민지통치시기 일본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공화국으로 귀국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가운데는 조선사람과 결혼하고 남편을 따라 우리 공화국으로 온 일본인녀성들도 있다.

오늘 우리 나라에서 살고있는 재조일본인들도 스스럼없이 공화국을 조국이라 부르며 인간의 참된 권리를 마음껏 행사해나가고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에서 살고있는 일본인녀성들도 우리 나라가 정말 살기 좋은 나라라고 한결같이 말하고있습니다.》 (김일성전집》 제54권 244페지)

재일조선인남편을 따라 우리 나라에 온 재조일본인녀성 라옥희는 자기의 수기에 이렇게 썼다.

《나의 본명은 나라 끼리꼬이고 고향은 일본 후꾸시마현입니다.

제가 조선인남편 김경종을 따라 조선에 온지도 54년이 흘러 어느덧 84살이 되였습니다.

당시 네자식을 데리고왔던 저는 지금은 43명이나 되는 식솔들을 거느리고 여생을 행복하게 보내고있습니다. 일본에 있는 저의 형제들과 친척친우들 그리고 우리 마을사람들은 저를 보고 자식들을 잘 두었다고, 자식복이 있다고 부러워합니다.

저 또한 자식들에 대한 자랑으로 은근히 긍지를 가지군 합니다. 어머니의 본분은 자식들을 잘 키우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훌륭한 자식뒤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는 말도 있는것이고…

하지만 사람들마다 부러워하는 그 자식복은 조선의 사회주의제도가 안겨준것입니다.

일본에서 살 때 우리 가정의 생활형편은 말이 아니였습니다. 곁방살이를 하면서 집고생도 했고 나 또한 배고파 애처롭게 우는 아이를 업고 남편과 함께 공사장에 나가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그러다나니 자식들을 공부시키려는것은 한갖 공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조선에 와서야 저는 네 자식들을 유치원과 학교에 보내여 국가의 혜택으로 키우면서 아무런 근심걱정없이 살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의 고향이 일본인것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하나 더 낳아 그애는 고향을 평양으로, 그늘 한점없이 깨끗하게 키우려고 했습니다.

내가 임신하자 나라에서는 담당의사까지 붙여주었으며 큰 병원에 입원하여 해산할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퇴원할 때 무심결에 입원비와 해산비, 약값 등 모두 합쳐 얼마를 내야 하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간호원의 말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것이였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일곱자식을 낳으면서 의사얼굴은 보지도 못하였고 입원이란 생각도 못하였다고 했는데 이 좋은 세상에서 내가 왜 아이를 하나만 낳겠습니까. 그래 둘이나 더 낳았습니다.

저는 자식들모두를 돈 한푼 들이지 않고 대학공부시켰고 시집장가를 보냈습니다. 그 소식이 일본신문들에도 실리였다고 합니다.

그때가 20여년전이였는데 일본의 옛 동향친구가 저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신문을 통해 내가 평양에서 아들딸 7남매를 다 대학공부시키고 시집장가보내여 손자손녀들을 거느리고 행복하게 살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고 부러움을 금치 못해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조차 나이먹도록 장가를 못보내여 늘 걱정하고있으며 손자는 언제나 보게 될는지 모르고있다고 숨김없이 털어놓았습니다.

가지많은 나무가 바람잦을 날이 없다고 자식많은 부모는 이래저래 걱정이 그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식이 많은 저에게는 늘 기쁘고 행복하고 즐거운 일만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고향방문으로 일본에 갔을 때도 자식자랑을 한바탕 늘어놓았던것이였습니다.

일곱자식들뿐아니라 오늘은 14명이나 되는 손자손녀들이 대학을 졸업하였거나 대학에 다니고있으며 증손자, 증손녀들도 태여났습니다.

대학졸업증만해도 20개가 넘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평양의학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평양건축종합대학, 김원균명칭 음악종합대학, 한덕수평양경공업종합대학, 조선체육대학, 평양외국어대학…

며느리, 사위들과 손자며느리, 손녀사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절날 43명이나 되는 식솔이 다 모여 즐길 때면 정말 생각이 깊어집니다.

내가 일본땅에 있었더라면 오늘과 같은 락을 생각이나 했겠는가고 말입니다.

하기에 저는 자손들에게 이 고마운 사회주의제도를 위해 맡은 일들을 더 잘하라고 늘 당부하군 합니다.》

영광군 장흥리 15인민반에서 사는 림경심녀성도 귀화한 재조일본인녀성이다.

림경심녀성은 1960년대초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에로의 민족대이동의 력사적인 흐름속에서 일본녀성인 어머니와 조선사람인 이붓아버지와 함께 우리 나라에 삶의 터전을 정한 일본소녀 이나다 유미꼬이다.

10여년세월 기쁠 때나 어려울 때나 당을 우러러 쓰고 또 쓴 편지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림경심녀성의 마음을 그대로 읽고있다.

《우리 철호때문에 온 집단이 마음을 쓰고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제라도 달려가 아들을 대신하여 사죄하고싶습니다. 철호를 두고 이 어머니보다 더 가슴아파하고 더 속을 태우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을 어제까지만 해도 다 모르고있었습니다. 우리 아들에게 많은 방조를 주어 정말 고맙습니다.

누가 잘못을 저지르면 친부모보다 더 가슴아파하며 고쳐주려고 애쓰는 우리 사회! 우리 철호를 업어주고 안아주고 이끌어주는 고마운 품을 이 몸이 죽어 흙이 된다 해도 잊지 않을것입니다.》

《당에서 죄를 지은 제 아들의 과거를 백지화해주었다니 무슨 말로 감사의 인사를 올리면 좋단 말입니까.

인간사랑의 위대한 태양이신 우리 장군님의 사랑의 빛발이 있어 우리에겐 추운 겨울이란 없습니다.》

《저의 소원은 아들이 맡은 일을 잘하여 앞으로 꼭 조선로동당원의 영예를 지니는것입니다.

철호가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에 입당하면 입당날자를 그의 생일로 고치겠습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된 사회주의토양에서는 움트고 꽃피지 못할 생이란 없다.

림경심녀성의 맏아들 리철호는 당의 믿음과 사랑속에서 새삶을 꽃피우며 혁신자로, 초급일군으로 자라나게 되였고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에 망라되여 대학도 졸업하게 되였으며 주체101(2012)년 10월 20일에는 그처럼 바라던 조선로동당원의 영예를 지니게 되였다.

당원이 된 아들을 품에 안은 림경심녀성의 두볼로는 뜨거운것이 하염없이 흘러내리였다. 인생소원을 성취한 그였으나 그는 당원이 된 아들을 둔 어머니의 기쁨과 행복, 자랑과 긍지를 온 나라 대가정의 자애로운 어버이께 아뢰고싶어 밤을 새워가며 편지를 썼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그가 올린 편지를 보아주시고 친필회답까지 보내주시는 영광을 안겨주시였다.

라옥희녀성이나 림경심녀성만이 아닌 온 나라 인민이 자신들의 운명의 체험으로 새긴 어머니란 부름, 한생토록 고르고 골랐어도 그보다 더 좋은 말을 찾을수 없었다는 어머니라는 부름으로 위대한 우리 당 조선로동당을 부르고있다.

바로 이 부름속에 우리 인민의 행복한 어제와 오늘이 있고 희망찬 래일이 있는것이다.

위대한 어버이의 품속에서 우리 인민의 사회정치적권리, 인권은 이렇게 보장되고있다. 인권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숭고한 인간사랑, 인민사랑의 화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