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
집안의 가장이신 김보현할아버님께서는 악랄한 일제식민지통치시기 자손들을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한 혁명투쟁에 아낌없이 내세워주시였을뿐 아니라
해방후 수많은 사람들이
김규식선생으로 말하면 일찌기 대학을 졸업하고 경성청년회 총무, 경신학교 교감, 연희전문학교 교수 등을 하다가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상해림시정부》 외무부장, 《중경림시정부》 부주석, 《조선민족혁명당》 명예주석을 지낸 명망있는 애국지사였다.
주체37(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회의에 참가한 김규식선생은 김구 등 정당, 사회단체
그러던 4월 27일 만경대를 방문하고 돌아온 김구선생으로부터 도무지 믿기 어려운 방문소감을 들은 김규식선생은 이튿날 만경대로 향하였다.
11시경 만경대에 이른 김규식선생은 만경봉기슭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초가집이
숭엄한 감정에 싸여 고향집뜨락에 들어선 선생이 집안팎을 둘러보니 마당한 구석과 헛간에는 우리 인민의 수난의 력사를 말해주듯 손때묻은 농쟁기들과 쭈그러진 김치독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집안살림이라야 장판도 아닌 노전우에 키낮은 책상과 라지오 한대 그리고 부엌의 소박한 물동이와 그릇가지들뿐 이였다. 더우기 맨 웃방에는 흙무지를 무드기 쌓아놓고 고구마싹을 기르고있었는데 방금 물을 주었는지 파란 잎사귀들이 물을 머금고있었다.
믿기 어려운 현실앞에서 놀라움과 감격이 뒤엉켜 아무 말도 없이 덤덤히 서있던 선생은 혼자말로 《
뒤늦게야 김보현할아버님께서 뒤울안에 계신다는것을 알게 된 선생이 먼저 찾아뵈옵지 못한 자책감에 싸여 평시에 볼수 없던 빠른 걸음으로 집뒤로 돌아가니 무명바지저고리에 검정조끼를 단정히 받쳐 입으신 할아버님께서 수수대껍질을 벗기고계시였다.
김보현할아버님께 정중히 인사를 드린 김규식선생은 어제 백범이 왔을 때도 할아버님께서 울바자를 엮고계시더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렇게 하루도 쉬지 않으시고 험한 일을 하시는가고, 손자분이신
할아버님께서는 자애에 넘친 안광으로 그를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사람마다 자기의 직분이 있지 않소.
이루 말할수 없는 감격과 흥분으로 하여 목이 꽉 메여 뒤말을 잇지 못하고 눈굽을 적시던 선생은 할아버님의 흙배인 손을 어루만지면서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정중히 작별인사를 올리였다.
수원들과 함께 만경대고향집을 나와 만경봉으로 오르면서 선생은 《과시
그날 숙소에 돌아온 선생은 만경대에서 받은 흥분된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며 밤늦게까지 수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오늘
이것은 비단 김규식선생 혼자만의 감탄이 아니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수를 헤아릴수 없이 해마다 만경대고향집을 찾는 우리 인민들은 물론 사상과 정견, 신앙이 다른 해외동포들과 세계 진보적인류의 한결같은 감탄의 목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