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슬기와 력사는 문화유산을 통하여 후세에 전하여집니다. 력사유적과 유물은 선조들이 어떤 문화를 창조하고 어떻게 생활하였으며 어떠한 길을 걸어 발전하여왔는가 하는것을 보여주는 실물자료입니다.》
민족의 슬기와 력사는 문화유산을 통하여 후세에 전하여진다.
력사유적과 유물은 조선민족의 슬기와 재능이 깃들어있는 재부이며 조선의 유구한 력사와 발전된 문화를 전해주는 귀중한 유산이다.
예로부터 관서8경의 하나로 꼽혀오는 백상루는 평안남도 안주시에 있다.
고려시기에 처음 세운 건물로서 안주성의 북장대였는데 여기에서 장대란 군사지휘처란 뜻이다.
백상루는 안주성 내성의 북쪽성벽 청천강기슭에 높이 솟은 언덕우에 청천강의 자연풍치와 잘 어울리게 세워졌다.
백상루는 옛 장대건물로서는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것의 하나였다.
백상루란 이름은 이곳에서 백가지 좋은것을 다 볼수 있다는 뜻에서 붙은것이다.
조선의 초기실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문인인 리수광(1563-1628)은 백상루의 아름다운 경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백상루에 운을 붙여》
오를수록 안겨오는 기이한 경치
흐르는 구름안개 상서로움 더해주네
뜨는 해도 가까이서 맞이하는 이곳
바라보니 한줄기 해빛이 눈부시네
예서 누가 살았는가 아득한 옛적에
신선들이 내려와 즐겁게 노닐었네
산그림자 비끼여 끝간데 없으니
백상루 마치도 눈속의 배같구나
참으로 백상루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매우 황홀하다. 그리하여 백상루를 관서 제일루라고도 하였다.
1753년에 고쳐지었던 백상루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미제의 야수적폭격에 의하여 모조리 파괴되였다.
남쪽 앞면 7간, 동쪽 옆면 6간, 서쪽 옆면 4간으로 되여있다. 백상루의 평면을 이렇게 구성한것은 안주성의 북쪽장대에서 청천강과 그 앞벌에서 벌어지는 적정과 상황을 감시하기 헐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백상루는 2층다락으로 하고 아래층과 웃층의 기둥을 이어대였다. 아래층의 높이도 2m가 넘게 하였기때문에 아래에서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활동할수 있게 되여있다. 2층마루둘레에는 닭의 다리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계자각란간이라고 부르는 란간을 둘러세웠다.
백상루에 입힌 단청도 훌륭하다. 백상루에서 그림을 그릴만한곳에는 거의나 단청을 입혔는데 련꽃무늬를 비롯한 여러 꽃무늬들사이에는 소나무, 대나무, 룡과 같은 단청그림도 그려져있다.
백상루는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장대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놀았다.
하기에 17세기 전반기 이름난 문인이였던 리식(1584-1647)은 시 《백상루에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향산의 남쪽땅은 예로부터 안주인데
큰 기 꽂힌 군영에선 전승을 떨쳤나니
성벽따라 평탄한 곳 칠불사 서있는데
출렁이는 강물우엔 백상루 비껴있네
전란은 멎지 않고 오랑캐들 침노하니
장사의 근심 한잔술에 잊혀질손가
외적을 무찌르던 그 일을 물어보려나
사당아래 강물만이 속절없이 흐르네
시에서는 뛰여난 슬기와 지략으로 수백만의 외래침략자들을 격멸한 선조들을 높이 찬양하면서 임진조국전쟁이후에도 국방을 소홀히 하여 외래침략자들의 침략에 이렇다할 방비책을 세우지 못하고있는 봉건위정자들을 비판하였다.
백상루는 오늘도 민족유산보호사업을 민족의 력사와 전통을 빛내이는 애국사업으로 여기시고 현명하게 이끌어주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