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교수 박사 김병철
2025.7.24.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전쟁에서 미제국주의자들은 군사적으로뿐아니라 정치도덕적으로도 돌이킬수 없는 참패를 당하였습니다.》
지난 세기 1950년대의 조국해방전쟁이 끝난 이후 세계는 조선전쟁을 가리켜 단꺼번에 미국의 《명망높은 장군》들을 력사의 《무덤》속에 매장한 전례없는 전쟁이라고 높이 찬양하였으며 그것은 전승의 그날로부터 세기가 바뀐 오늘에까지 전설처럼 전해지고있다.
미제는 조선전쟁에 《전쟁의 신》이라고 떠들던 맥아더를 비롯하여 릿지웨이, 워커, 띤 등 미국의 이름있다는 장군들을 모조리 동원하였으나 《명망》높은 미국의 장군들은 조선전쟁을 통하여 자기의 군사적지략과 무훈으로 명성을 떨치기는 고사하고 파면당하거나 포로가 되고 지어는 자기 목숨도 보존하지 못하고 황천객이 되는 등 비참한 운명을 면치 못하였다.
조선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장군들중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던 인물은 조선침략전쟁을 직접적으로 계획하고 도발하고 지휘한 맥아더였다.
맥아더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모장교로 참가하였으며 1919년에는 미륙군사관학교 교장, 1930년부터 5년간 미륙군참모총장, 1941년 7월에 미극동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여 12월부터 태평양전쟁에 참가하였다. 1942년 3월에 련합국군 서남태평양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여 일본에 대한 반공격작전을 지휘하였으며 1944년에 원수로 승급한 경력을 가지고있었다.
이처럼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있던 맥아더는 1950년 7월 《유엔군》사령관의 감투를 쓰고 제국주의련합세력의 조선침략전쟁을 직접 계획하고 총지휘하였으나 결국 패전의 책임을 지고 1951년 4월에 모든 직책에서 파면되고말았다.
워커는 미8군사령관으로서 조선전쟁시기 악명을 떨친 살인장군이였다.
1948년 9월 미8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워커는 조선전쟁이 발발한 후 한국이 괴멸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미8군을 조선전선에 긴급출동시켜 미군과 한국군을 총지휘하였으나 조선인민군의 노도와 같은 공격앞에서 대전을 잃었으며 이어 락동강좌안에까지 밀려내려가 미8군을 바다가에 처박힐 운명에 처하게 만들었다. 전쟁의 상황을 역전시켜보려고 날뛰던 워커는 1950년 12월 13일 련천-서울도로상에서 조선인민군 제2전선부대 전투원들이 매설한 지뢰에 걸려 황천객이 되는 비참한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1951년에 워커의 후임으로 미8군사령관이 된 밴프리트의 운명도 선임자와 크게 다를바 없었다. 밴프리트는 전선정황을 역전시켜보려고 방대한 병력과 장비를 동원하여 1951년 8-9월에 《하기공세》, 9-11월에는 《추기공세》, 1952년의 《교살작전》, 《초토화작전》, 《김화공세》, 1953년에 《신공세》를 감행하면서 이른바 《모범전투》라고 하는 정형고지전투까지 감행하였으나 련전련패하였다. 그 책임으로 하여 정전을 앞두고 해임되였으며 1953년 3월에는 륙군에서 퇴역되는 수치를 면치 못하였다. 《상승사단》이라고 떠들던 미24사단장 띤은 장성별을 달고 조선전쟁에 참전하였지만 인민군병사에게 손을 들고 포로되는 신세가 되였다.
《상대한 적인 김일성장군이 30대의 젊은 장군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것은 심히 유감스럽고 수치스러운 대아메리카의 비극이 아닐수 없다.》, 바로 이것이 미제의 고백이였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의 탁월한 군사적지략과 령군술에 의하여 조국해방전쟁은 미국의 《명망높은 장군》들을 매장하는 하나의 거대한 무덤으로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