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을 나라의 임금으로 내세우시고

 2020.4.29.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세상에는 우리 수령님과 같이 한평생을 오로지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오시는분은 없습니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12권 35페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민위천을 좌우명으로 삼으시고 한평생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치신 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시였다.

인민의 행복을 가꾸시는것을 가장 큰 락으로 삼으신 우리 수령님께 있어서 인민을 위하여 일을 많이 하시는것은 더없이 즐거운 휴식이시고 참다운 보람과 기쁨이시였다.

주체54(1965)년에도 다른 해와 마찬가지로 새해벽두부터 인민을 위한 로고로 분망한 나날을 보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6월 어느날 일군들에게 얼마간 지방의 어느 한곳에 가계시겠다고 하시였다.

한해가 절반이 가도록 위대한 수령님께 하루의 휴식도 보장해드리지 못하여 안타까와하던 일군들은 기쁨을 금치 못하였다.

그들은 모처럼 마련된 이번 기회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즐겁게 휴식하실수 있게 낚시대와 등산모도 준비하였다.

그때로부터 한주일후인 7월 6일이였다.

일군들은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풍치수려한 산도, 맑은 물 출렁이는 호수도 있어 휴식하기에 더없이 좋은 지방의 어느 한곳으로 갔다.

일군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아름다운 산천을 돌아보시면서 겹쌓인 피로를 푸시기를 바라면서 호수가에 나가 물고기가 잘 물릴만한 장소도 점찍어두었다.

그런데 위대한 수령님께서 도착하신지 얼마 안되여 숙소로 삭주군 책임일군들이 찾아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평양을 떠나시면서 이미 그들을 부르시였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삭주군 책임일군들과 오랜 시간 담화를 하시였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간 다음에는 곧 현지지도의 길에 오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곳에 도착하신 첫날부터 이처럼 매우 바쁘게 시간을 보내시였다.

이렇게 며칠이 흐른 일요일이였다.

일군들은 경치좋은 이곳에 오시여 잠시의 휴식도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시는 위대한 수령님께 호수에 나가보시자고 말씀드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는 일군들에게 여름철에 호수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좋을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러나 자신에게는 시간이 없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자신께서는 군안의 책임일군들도 만나보고 옥포협동농장과 유평협동농장에도 가보아야 한다고, 이곳을 떠나는 날에는 그들과 함께 호수에 나가보겠다는것을 약속한다고 하시였다.

한 일군이 위대한 수령님께 약속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곁에 있는 일군을 가리키며 여기에 보증인이 있으니 꼭 지켜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크게 웃으시며 그렇게 하겠다고 하시였다.

여러날이 흘러 마침내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곳을 떠나실 날이 되였다. 하늘에는 아름다운 꽃송이마냥 흰 구름이 둥실 뜨고 싱그러운 바람이 서늘히 불어오는 맑고 상쾌한 날씨였다.

일군들은 점심참에 야외에 식탁을 차리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즐기시는 어죽을 쑤어올릴 속궁냥을 하며 아침부터 기분이 붕 떠있었다.

그러나 일군들의 이런 생각은 공연한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 일군을 찾으시더니 삭주식료공장에 가본 다음 뒤이어 구성군(당시), 정주군(당시), 박천군에 들려 일군들을 만나보아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오늘이 호수가에 나가 휴식하기로 약속한 날이라는것을 자신도 알고계신다고, 그런데 래일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가 있어 오늘 꼭 떠나야 하겠는데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고, 그러므로 오늘의 약속을 후날로 미루어야 하겠다고 하시였던것이다.

일군은 휴식하기 더없이 좋은 곳에 나와계시면서도 평양에서보다 더 긴장하고 바쁜 나날을 보내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를뿐 다른 말씀을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일군은 생각할수록 너무나 서운하고 안타까와 평양에 돌아오는 길에 위대한 수령님께 래일 정치위원회에 사실그대로 다 보고하겠다고 볼부은 소리로 말씀드렸다.

그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며 옛말에 《신로군일》이라는 말이 있다고, 이것은 신하가 일을 많이 하면 임금이 편안하다는 말인데 나는 인민의 신하이고 인민은 우리의 임금이라고, 그러니 우리가 일을 많이 하여야 인민들이 편안하게 지낼수 있다고 교시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일을 많이 하는것이 자신에게는 휴식이라고, 이보다 더 즐거운 휴식이 어디에 있겠는가고 하시였다.

주체58(1969)년 9월 21일이였다.

그날은 사람들 누구나 뜻깊게, 즐겁게 하루를 보내는 일요일이였다.

그전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년초부터 60년대의 마지막해를 보내며 긴장하게 일해온것만큼 래일은 일요일인데 간부들이 집에서 다 쉬도록 하라고 하시였다.

그리하여 일군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도 마음을 놓으시고 저택에서 하루를 보내실줄 알았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요일 아침 한 일군을 찾으시여 몇곳을 다녀오자고 하시였다.

일군이 위대한 수령님께 지난 밤에도 늦게 들어오셨고 또 오늘은 일요일이니 오전한겻만이라도 좀 쉬시고 오후에 떠나셨으면 하는 의향을 말씀드렸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머리를 저으시면서 그 일군에게 자신과 같이 이제는 10년나마 일해오는데 아직 자신의 마음을 다 모르고있다고, 자신께서 언제 일요일이라고 하여 집에 있어본 일이 있었는가고, 여느때는 일이 바빠 현지에 자주 나가보지 못해도 일요일에 가까운 곳에라도 나가 현실을 료해하고 인민들도 만나보고싶다고, 자신에게는 이이상 더 만족한 일요일은 없으며 이게 자신의 휴식이라고 교시하시였다.

이리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요일에도 아침일찍부터 현지지도의 길을 떠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 강서군(당시) 청산협동농장과 룡강군 옥도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시고 6월3일협동농장 시루식관수포전까지 돌아보시였을 때는 저녁무렵이 되였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시 온천군에서 피살자유가족들을 만나시여 그들의 생활을 료해하시고 인민생활향상과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고서야 숙소로 향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처럼 누구나 즐기는 일요일 하루를 인민을 위한 현지지도의 길에서 바치시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위대한 수령님의 일요일 하루일과가 끝난것이 아니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숙소에서 다시금 그해 당창건기념일에 즈음하여 당 및 국가기관 일군들앞에서 하실 강의내용을 집필하시고 새날이 잡혀서야 손에서 일감을 놓으시였다.

실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한순간의 휴식도 없이 우리 인민을 위하여 바치신 심혈과 로고는 끝이 없었다.

진정 우리 나라에서 임금은 인민이였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인민이라는 임금의 신하이시였다. 우리 인민의 행복의 크기는 우리 수령님의 고생의 크기였다.

하기에 우리 인민은 위대한 수령님어버이라고 부르고 그이께서 천품으로 지니고계신 사랑을 어버이사랑이라고 소리높이 칭송하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