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교수 박사 궁영숙
2019.7.24.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어머님의 인정미는 더없이 뜨거웠습니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23권 294페지)
해방된 조국땅에서는 은혜로운 인민적시책들이 련이어 실시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베풀어주신 민주개혁의 혜택으로 농민들은 땅의 주인이 되고 로동자, 사무원들은 일할 권리, 휴식할 권리를 가지게 되였으며 새 세대들에게는 배움의 길이 활짝 열리였다.
그러나 평양역과 서평양역을 비롯한 역기다림칸들과 선교시장을 비롯한 여러 시장들을 중심으로 의지가지할데 없는 고아들이 떠돌아다녔다.
많은 사람들이 나라가 해방되여 좋은 세상을 만났는데 고아들에 대한 문제를 빨리 해결할수 없겠는가고 걱정하였다.
어느날 김정숙동지께서는 시내에 나가시였다가 길가의 잔디밭에서 자고있는 두 소년을 보게 되시였다.
해질무렵인데도 그냥 정신없이 자고있는것이 이상하여 가까이 다가가신 그이께서는 두 소년을 집에 돌려보내시려고 깨우시였다.
잠에서 깨여난 그들의 모습은 말이 아니였다.
가슴이 아프시여 그들을 바라보시던 김정숙동지께서는 헝클어진 그들의 머리를 빗겨주시고 단추도 채워주시면서 집은 어디며 부모들은 어디에 있는가고 다정히 물으시였다.
김정숙동지의 살뜰한 인품에 끌린 그들은 떠듬떠듬 대답을 올렸다. 그애들은 다 부모를 잃고 이리저리 헤매이며 살아가는 아이들이였다.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심히 올리는 말을 통하여 그들의 기구한 운명을 속속들이 헤아려보신 김정숙동지께서는 그애들을 가까운 식당에 데리고 가시여 저녁밥을 먹이신 후 시보안서에 맡기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거리에서 보신 고아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으시여 위대한 수령님께 그 사실을 말씀드리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제는 그 불쌍한 고아들을 그냥 내버려둘수 없다고, 아무리 나라사정이 어렵더라도 우리는 고아들에 대한 문제를 결정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어느날 한 녀성일군을 만나시여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전달해주시며 깊은 감동에 휩싸여있는 그에게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고아들에 대한 문제는 누구나 관심해야 하지만 자식을 키우는 우리 어머니들, 녀성들이 더 깊이 관심해야 한다, 고아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이 필요하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이께서는 우리가 그애들의 어머니가 되여주자, 고아들에 대한 구제대책은 인민위원회 보안국에서 취하고있지만 이 사업은 사회적운동으로 벌려야 하며 특히 녀맹조직들이 여기에 적극 협력하여야 한다고 본다, 우리 생각에는 녀맹에서 고아들에 대한 실태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어떤 방법으로 이 사업에 도움을 줄수 있겠는가를 광범히 토의해보는것이 좋을것 같다고 하시였다.
김정숙동지의 말씀을 받아안은 중앙녀맹에서는 우선 평양시안의 고아들의 형편을 료해하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당시 평양시에는 의지가지할데 없는 로인, 장애자, 극빈한 환자 등 사회적구제를 요하는 사람들을 돌봐주고있는 구호원(당시)이 10여개나 있었다. 여기에는 고아들도 적지 않게 들어가있었는데 그들에 대한 교육과 교양은 한심한 형편에 있었다.
녀맹조직에서는 보안기관과의 협력밑에 거리에서 헤매이고있는 고아들을 빠짐없이 등록하여 구호원에 보내며 녀맹조직들이 고아들이 들어있는 구호원을 대상하여 후원사업을 벌릴 계획안을 만들어 김정숙동지께 올렸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동무들이 계획하고있는 사업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몇가지 문제를 푸는것이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그에 대해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고아문제를 풀자면 전문적인 고아원과 애육원을 만드는것이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되면 고아들에 대한 양육과 교육교양사업이 원만히 실행될수 있을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물론 이와 같은것은 인민위원회가 나서서 할 일이지만 녀맹조직들이 나서서 고아원과 애육원을 꾸리고 고아들을 데려오는 사업도 군중적으로 돕는다면 이 사업이 더 빨리 추진될수 있을것이라고 하시였다.
김정숙동지의 말씀을 받들고 녀맹원들은 거리에서 방황하고있는 고아들을 빠짐없이 고아원이나 애육원에 받아들이는 사업을 적극 벌려나갔다.
그리하여 당시 학령전어린이들을 키우는 평양보육원, 학령기어린이들을 키우는 평양양육원, 보린원 등이 새로 생기게 되였다.
주체36(1947)년 5월 어느날 김정숙동지께서는 평양양육원의 실태를 료해하시였다.
당시 평양양육원은 제4인민학교(당시)옆에 있는 2층벽돌집에 자리잡고있었는데 방도 널직널직하고 해빛도 잘 들어 어린이들의 보금자리로는 안성맞춤한 곳이였다.
그러나 양육원에서는 교원력량이 걸려 원아들에게 아직 교육은 주지 못하고있었으며 자금이 부족하여 운영사업에서도 지장을 받고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양육원안에서 원아들에 대한 교육사업까지 하려는 그들의 계획을 들으시고 그럴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하자면 나이와 학력이 서로 다른 원아들의 구성에 맞게 소학교로부터 대학에 이르는 모든 과정안을 다 취급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에게는 그 모든 학제에 필요한 교육을 줄 자질을 갖춘 교원이 부족하며 또 나라형편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 생각에는 원아들의 나이와 학력에 맞게 그들을 시안의 각급 학교들에 보내여 공부시키는것이 좋을것같다, 이렇게 되면 양육원에서는 학부형의 역할만 하면 될것이라고 가르치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양육원의 운영자금문제를 풀수 있는 방도도 가르쳐주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고아원을 후원하는 사회적운동을 벌릴데 대해 가르치시면서 녀맹조직들에서 사회적로동을 조직하여 거기에서 나온 돈을 고아원들에 보내줄수도 있고 녀성들속에서 여유물품들에 대한 수집운동을 벌려 고아들의 생활을 방조할수도 있을것이라고, 그리고 개인기업가, 상인들속에 들어가 해설선전사업을 벌려 그들이 자진하여 고아원을 도와나서도록 하는것도 필요하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녀맹이 책임지고 평양양육원을 본보기단위로 꾸려보라고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그후 녀맹에서는 사회적운동으로 고아원을 돕기 위한 사업을 적극 벌려나갔다.
녀맹원들속에서는 자기들이 가지고있던 비단이불과 자금을 희사하는 아름다운 소행이 꽃펴났으며 어떤 녀맹조직에서는 양육원을 찾아와 원아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그들에게 노래와 춤도 배워주고 방도 꾸려주며 빨래도 해주는 등 성심성의로 도와주었다.
여러 정당, 사회단체들에서도 고아원을 적극 도와나섰다.
주체36(1947)년 11월초 민전평양시위원회(당시)에서는 김정숙동지의 보살피심속에 본보기단위로 꾸려진 이 양육원에 대한 참관사업을 조직하였는데 여기에는 시안의 20여명의 기업가, 상인들도 참가하였다. 이곳을 돌아본 기업가, 상인들은 고아들을 국가적으로 맡아키우는 인민정권의 시책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으며 참관을 마치고 돌아가서는 고아원을 돕기 위해 많은 자금과 물품들을 보내여왔다.
그리하여 고아원들은 점차 훌륭한 물질적조건을 갖추게 되였으며 고아들은 아무런 근심걱정없이 행복하게 배우며 자라날수 있게 되였다.
후에 평양양육원은 국립평양애육원으로 개편되였는데 당시 이 애육원만 보더라도 100여명의 원아들가운데서 80여명이 소학교에서, 10여명이 중학교에서, 4명이 전문학교에서, 1명은 대학에서 공부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김정숙동지의 크나큰 사랑과 배려에 의하여 고아문제는 전국적범위에서 훌륭히 해결되여나갔다.
주체36(1947)년 9월에 강동군의 국립시족애육원과 함흥애육원, 청진애육원, 원산애육원들이 설립되고 정주를 비롯한 여러곳에 고아원들이 세워짐으로써 부모없이 떠다니던 고아들이 희망찬 생활을 누려나가게 되였다.
이렇듯 김정숙동지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뜻을 받드시고 부모없는 아이들을 국가가 맡아키우는 사업을 세심히 보살펴주시고 이끌어주심으로써 새 민주조선건설의 초시기에 벌써 고아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는데 기여하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