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당과 인민은 우리 민족사에 이름을 남긴 력사적인물들에 대해서도 공정하게 평가하고 그들의 업적을 길이 전하고있습니다.》 (
대조영은 고구려말기에 북류송화강(당시의 속말수)일대의 유력한 정치세력출신으로 알려진 대(걸걸)중상의 아들로 태여났다.
* 대씨가문의 계보를 전하는 《협계태씨족보》에는 대조영의 출생과 관련한 전설내용이 씌여있다. 거기에는 대조영의 어머니 시(時)씨가 꿈에 북두칠성의 정기를 삼키고 그를 잉태하였다, 그가 대조영을 낳을 때 방안에 상서로운 자주빛기운이 자욱이 서리고 검은 색갈의 투명한 광선이 집둘레를 온통 감쌌다. 대조영을 낳고보니 갓 태여난 아이의 얼굴은 검은 옻칠을 한것같이 번들거리고 잔등에는 좌측에 해가 있고 오른쪽에 달이 새겨져있었다고 되여있다.
대조영의 출생에 대한 이 전설은 물론 현실에 있을수 없는 허황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신비스러운 출생경력을 가진 인물이 통치하는 발해가 륭성번영할것을 바라던 당시 사람들의 념원이 깃들어있다.
대중상은 대조영에게 큰 관심을 돌려 그가 날래고 용맹하며 군사를 잘 쓰는 장수로 자라날수 있게 하였다. 장수로 떠받들리우던 대조영은 멸망한 고구려를 다시금 재생시키려는 결심을 굳게 가지였다.
684년에 진국이라는 소국이 세워지자 그는 진국의
그 당시 료하서쪽에 위치한 영주에는 당나라가 설치한 도독부가 있었고 그 우두머리는 조문홰였다. 조문홰를 비롯한 당나라통치배들은 이곳에서 살고있던 고구려유민들과 말갈족, 거란족, 해족, 습족 등 이민족들을 가혹하게 억압하고 착취하였다. 그것으로 하여 이 지역에서는 당나라를 반대하는 기운이 급속히 자라나고있었다.
이것을 감촉한 대조영은 영주에서 폭동을 일으켜 고구려재건의 결심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폭동준비가 완료되자 대조영은 696년 5월 영주에서 거란족, 말갈족과 함께 당나라를 반대하는 대규모의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군은 영주를 공격하여 조문홰를 비롯한 당나라관료들을 처단하고 그 주변일대를 장악하였다.
폭동에서 승리한 대조영은 거란폭동군이 영주서쪽방면으로 진격하고있을 때 고구려유민폭동군을 거느리고 696년 9월에 대릉하하류지역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공격하였다.
대조영의 폭동군이 처음 영주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 다음해인 697년 4월에 이르러 불리한 형편에 놓이게 되였다. 그것은 당나라의 북쪽에 있던 돌궐의 극한 묵철이 갑자기 당나라에 합세하면서 거란폭동군의 후방 인신성(영주서북 400리지점)을 공격하고 여기에 해족의 군사들까지 합세하여 나섰기때문이였다.
당나라군과 거란족, 해족군사들에 의하여 앞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 거란폭동군은 많은 손실을 입었으며 지휘자였던 손만영까지 희생됨으로써 거란폭동군은 와해되고말았다.
거란폭동군을 진압한 당나라군은 련이어 대조영이 거느리는 고구려유민폭동군을 소멸하는데 달라붙었다.
당나라군의 우두머리 리해고는 먼저 말갈족추장 걸사비우가 거느리는 부대를 격파한 다음 련이어 대조영이 거느리는 고구려유민폭동군을 추격하여왔다. 그러나 당나라군은 대조영의 유인매복전에 걸려 천문령에서 거의나 녹아나고말았다.
천문령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둔 대조영은 부대를 거느리고 료하를 건너 동모산으로 향하였다. 동모산(오늘의 중국 길림성 돈화시)에 이르는 머나먼 행로에서 대조영은 자기의 대오를 더욱 확대하였다.
동모산에 도착한 대조영은 몇년간의 간고한 투쟁과정에 이룩한 성과에 기초하여 698년에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 발해국의 창건을 선포하고 왕자리에 올랐다. 그는 국호를 발해라고 정하였으며 년호를 천통(天統)으로 하고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제도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당나라의 있을수 있는 공격을 막기 위하여 축성사업을 다그치고 주변의 여러 세력들을 포섭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대조영은 주동적인 대외활동을 벌려 발해가 거란, 해족, 돌궐과 친선적인 관계를 맺게 하였으며 705년에는 적대적관계에 있던 당나라와도 관계를 가질수 있게 하였다. 그후 대조영은 714년 12월과 718년에 두나라 관계를 한층 밀접히 하기 위해 자기의 아들들을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대조영은 고구려시기의 높은 생산력발전수준을 그대로 계승하여 봉건국가의 물질적부를 늘이기 위한 대책도 취하였다.
발해의 건국과 초기발전에 기여한 대조영은 719년 3월에 사망하였다. 대조영이 사망된 후 그의 시호를 고왕이라고 하였다.
* 대조영이 죽은 후 발해사람들이 태백산대숭전(위치는 알수 없음)에 있는 고경각(高經閣)에 그의 신상(神像)을 걸어놓았으며 또 진단(震壇)을 세우고 그에 대한 제사를 정상적으로 진행하였다고 한다. 발해에 고경각과 진단이 있었는지는 더 따져보아야 하겠지만 당시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시조왕인 대조영을 숭배하는 제사의식을 진행하였다는것은 정확한것으로 볼수 있다.
이처럼 대조영은 고구려재생의 뜻을 품고 적극적인 활동을 벌려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 발해를 세운 시조왕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