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간삼봉의 《호박농사》

 2025.4.21.

조선민족이 수천년력사에서 처음으로 맞이하고 높이 모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인류사에 공인된 위인중의 위인으로서 그이의 혁명생애와 활동에는 세월이 흐를수록 만사람의 끝없는 흠모와 경탄속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수많은 일화들이 아로새겨져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세계의 진보적인민들은 수령님을 우리 시대의 〈위인중의 위인〉으로 우러르고있으며 한 세대에 강대한 두 제국주의를 때려눕힌 강철의 령장이라고 높이 칭송하고있습니다.》

한 세대에 강대한 두 제국주의를 타승하시고 70성상 총대와 더불어 백승을 떨치면서 이룩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업적을 칭송하는 혁명일화들에는 신출귀몰하시며 적들을 답새기신 그이의 신묘한 전법을 칭송하는 간삼봉전투에 대한 일화도 있다.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주력부대가 간삼봉계선에 진출한것은 1937년 6월말경이였다.

당시 일제는 보천보전투에서 당한 참패를 만회하기 위한 소위 《대토벌》을 서둘렀다.

중국동북에 주둔하고있는 부대들로써는 도저히 조선인민혁명군에 맞설수 없다는것을 보천보와 구시산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전투들을 통하여 톡톡히 맛본 일제는 라남 제19사단소속 함흥74련대의 2 000여명의 정규군을 동원하였다.

함흥 제74련대가 수십대의 자동차를 타고 혜산방면으로 밀려들어 신파쪽에서 압록강을 건넜는데 《토벌》대의 무력이 어찌나 많았던지 30~40명이 탈수 있는 목선으로 하루종일 신파나루를 건네였다는것이다.

적이 2 000명이면 유격대보다 훨씬 우세하였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에서 건너온 일본군 대부대와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하시였다. 적이 대부대로 공격해오면 재빨리 분산하여 기동전을 벌리는것이 유격전의 일반적인 전술이지만 이번에는 관례를 깨뜨려 대부대를 대부대로 치자는것이 위대한 수령님의 확고부동한 결심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팔반도로 향하던 행군을 일단 멈추게 하시고 싸움터로 간삼봉을 택하시고 6월 29일 저녁에 지휘관회의를 여시고 전투방안을 내놓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번 전투에서 적의 정규전법에 말려들지 말고 유격전법을 주동적으로 활용할데 대하여 강조하시면서 그러자면 인민혁명군부대들이 먼저 산릉선을 차지하고 적들이 골짜기에 몰리게 유도하며 부대배치에서도 도식을 범하지 말고 적들이 유격대가 주의를 덜 돌릴것이라고 볼수 있는 곳에 력량을 많이 배치하고 전투과정에 부대들이 수림을 리용하여 좌우로 빨리 기동하면서 림기응변하도록 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위대한 수령님의 령활한 지략과 전법으로 간삼봉전투는 조선인민혁명군의 빛나는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유격대는 수많은 적을 살상하고 놈들의 《토벌》기도를 완전히 파탄시켰다.

전투가 있은 다음날부터 적들은 혜산, 신파와 간삼봉부근에 있는 마을들에서 담가와 우마차, 자동차를 징발하여 시체운반을 하였으며 시체마다 흰 광목을 덮어놓고 사민들이 얼씬하지 못하게 단속하였다. 적들이 제일 두려워한것은 저들의 패전상이 만천하에 드러나는것이였다.

사상자수가 어찌나 많았던지 시체에서 머리만 잘라서 마대나 나무상자에 넣어가지고 우마차에 실어 자동차가 있는데까지 날랐다.

시체운반에 동원된 일본병사에게 어떤 농민이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달구지에 싣고가는것이 뭔가요?》

《가보쨔(호박)다.》

《〈가보쨔〉농사가 대풍이군요. 좋은 국거리니 많이들 자시우.》

적들이 유격대를 치겠다고 신파에서 압록강을 건너올 때에는 하루종일 걸렸는데 다시 건너갈 때는 반시간 남짓하게 걸렸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은 항일대전을 령도하시면서 탁월한 지략으로 세계 유격전쟁사에 영원히 아로새겨질 수많은 전법들을 창조하시였다.

하기에 오늘 조선인민과 진보적인류는 위대한 수령님을 항일의 전설적영웅으로 높이 칭송하고있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