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날의 우리 나라 력사에서 우리 민족이 가장 강하였던 시기는 고구려시대였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높은 애국심과 창조적지혜와 재능을 보여주는 구월산성은 우리 나라 명산의 하나인 구월산에 있다.
최근에 진행된 조사발굴을 통하여 구월산성은 고구려시기에 처음 쌓았고 고려와 조선봉건왕조시기에 개축하면서 계속리용하였다는것이 새로 밝혀지게 되였다.
구월산성은 구월산의 주봉인 사왕봉(954m)을 중심으로 그 좌우의 산릉선과 여러 봉우리들을 련결하여 쌓은 고로봉식산성이다.
성벽을 쌓은 산릉선과 산봉우리들은 절벽이거나 급한 경사로 하여 지세가 험하다. 성은 마치 배모양처럼 남북은 높고 길며 동, 서쪽은 길고 중간부분은 낮다.
그러므로 《신중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에서도 《성은 험하고 남북에는 통로가 없고 동서에만 좁은 길이 있으며 성의 생김새가 마치 큰배와 같다.》고 하였다.
구월산성의 성벽을 실측한데 의하면 총 둘레는 약 5 230m이다.
성벽을 쌓은 방법은 량면쌓기를 기본으로 하였으나 부분적으로는 외면쌓기 방법도 적용되였다.
성돌은 구월산에 흔한 화강암을 각이한 크기의 4각추모양으로 가공하여 쌓았다. 성신은 기초우에 큰 성돌(60×40×80cm)을 놓은 다음 두번째 성돌은 뒤로 약 4~9cm들어가 놓고 세번째 성돌은 두번째 성돌에서 뒤로 3~6cm더 들어가 올려놓았다. 그다음부터는 뒤로 들어간 정도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성돌을 4~6단까지 올려쌓고 그다음 점차 수직으로 쌓아올라갔다. 이런 성벽축조방법은 고구려평양성의 을밀대축대를 비롯한 고구려성벽의 고유한 축조형식과 같다.
현재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각이한데 낮은 곳은 약 3.5 m, 높은 곳은 약 5.2m이다.
구월산성의 성문은 동문, 서문, 남문 등 세곳에 있다.
서문으로는 은률로 통하며 동문으로는 안악, 재령으로 통할수 있고 남문으로는 안악, 삼천, 신천으로 통할수 있으나 길이 매우 험해서 다니기 힘들다.
구월산성에는 성문에 옹성이 따로 없다. 그것은 성문밖이 경사가 급하므로 설치할 필요가 없었기때문인것 같다.
성벽의 녀장시설은 지금도 일부 남아있다.
서쪽성벽을 조사한데 의하면 1.2m간격으로 근총안과 원총안이 배치되여있다.
사혈구의 높이는 약 20cm, 너비 약 30cm정도인데 판돌로 쌓았다.
구월산성에서 장대는 지형상으로 보아 북쪽성벽의 사왕봉과 남쪽성벽의 봉우리, 성의 중간언덕 등 여러곳에 있었던것으로 보아진다.
구월산성에서는 많은 집자리들이 발굴되였다.
옛 기록에 의하면 성안에는 좌창(좌측 창고)과 우창(우측 창고)이 있는데 좌창은 문화군, 신천군, 안악군에 속하고 우창은 은률군, 풍천군, 송화군, 장연군, 장련군에 속한다고 하였다.
성안의 골짜기들에서 임의의 곳을 파보아도 물이 나온다. 풍부한 물원천은 성에 수천명을 수용할수 있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였다.
구월산성에서 발굴된 붉은색암기와와 수기와들은 고구려시기에 많이 쓰이였다.
구월산성은 성벽의 구조와 축조방법 그리고 발굴된 유물들과 문화층관계 등으로 보아 고구려시기에 처음으로 쌓은 성이며 고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개축하면서 계속 리용한 성이라는것을 보여준다.
오늘 구월산과 구월산성은 당의 민족유산보호정책에 의하여 력사유적들이 원상복구되고 유원지로 훌륭히 꾸려져 인민들의 문화휴식터로, 애국주의교양장소로 널리 리용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