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항일혁명출판선전일군 최경화

 2025.4.21.

설한풍 휩쓰는 백두의 밀림속에서 주체적출판보도물의 고귀한 전통을 마련하는데 이바지한 항일혁명출판선전일군들속에는 조선인민혁명군 대내주간신문 《종소리》의 주필이였던 항일혁명투사 최경화동지도 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최경화는 글재주도 뛰여나고 그림도 썩 잘 그리는 보기 드문 재사였다. 〈종소리〉의 삽화는 대부분 그가 직접 그려넣은것이였다. 정치상학시간에는 강사로 나섰고 전투장에서는 선참으로 돌격에 나서군 하는 선봉투사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보기 드문 재사라고 평가하신 최경화동지는 함경북도 성진군(오늘의 김책시)의 가난한 농사군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최경화

고향에 있을 때 청년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다가 적들의 추적을 피하여 장백으로 건너가 서당훈장의 간판을 걸고 군중계몽에 몰두하던 최경화동지는 1936년부터 혁명에 참가하여 지방조직에서 활동하였다.

유능한 지하공작원으로 성장한 최경화동지는 1937년 1월에는 조국광복회 회원으로, 장백현 17도구당지부 조직부 책임자로, 성진(김책시)방면 정치공작원으로 활동하면서 각계각층의 청년들과 인민들을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사상으로 무장시켜 수령님의 두리에 묶어세우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렸다.

아는것이 많고 작풍이 좋은것으로 하여 그는 얼마후부터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 비서처에서 사업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마당거우밀영지에서 집중적인 군정학습이 시작될 때에 조선인민혁명군 대내주간신문 《종소리》를 창간하시고 그 주필로 최경화동지를 임명해주시였다. 이것은 최경화동지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기대의 표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를 회고하시면서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최경화는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지만 어려운 신문발간사업을 능숙하게 주관하였다고 하시면서 그가 그렇게 할수 있은 비결은 평소에 공부를 많이 하여 다방면적인 지식을 섭취한데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교시하시였다.

사실 그때 신문을 발간한다는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더구나 난생 처음으로 신문발간사업을 해보게 되는 최경화동지에게는 애로와 난관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그러나 그는 주저하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최경화동지는 위대한 수령님께 《종소리》신문을 발간하는 사업을 목숨바쳐 수행해야 하는 하나의 전투라고 생각하고 사령관동지께서 주신 임무를 꼭 수행하겠습니다라고 맹세다지였다.

최경화동지는 이 나날에 전설적영웅이시고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빨찌산대장이신 김일성장군님의 위인적풍모를 그대로 형상한 조선화 《빨찌산호랑이》, 등사그림 《김대장 대원들의 신발을 기워주시다》, 《김대장 할머니병치료에 쓰라고 산삼을 주시다》를 비롯한 많은 그림들을 훌륭하게 창작하여 《종소리》에 편집함으로써 항일유격대오안에 수령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흠모의 정이 더욱 끓어넘치게 하였다. 최경화동지는 어려운 일에는 누구보다 먼저 나서고 동무들이 곤난해할 때에는 제몸을 아끼지 않고 도와주어야 후련해하는 성미였다.

늘 몸차림과 성미가 단정하여 전우들속에서 《대학생》이라는 애칭으로 사랑을 받아온 재능있고 열정적인 투사였던 최경화동지는 1938년초 무송현 정안툰전투에서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을 지니고 맡은 혁명임무수행에서 책임성이 강하고 성실할뿐 아니라 소탈하고 붙임성이 좋아 대원들모두의 사랑과 존경을 받던 항일혁명출판선전일군 최경화동지!

주체적출판보도활동사에 뚜렷한 자욱을 남긴 최경화동지는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들과 대원들에게 조국해방에 대한 희망과 전투승리의 새소식을 알려주는 종소리였던 항일혁명출판물 《종소리》와 더불어 오늘도 영생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