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대성산성에서 알려진 고구려의 식량창고터유적

 2025.5.1.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력사유적유물들은 우리 선조들이 투쟁과 창조적활동을 통하여 이룩한 귀중한 유산이며 후세에 길이 전해갈 민족의 재부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투쟁과 창조적활동을 통하여 이룩한 귀중한 문화유산들가운데는 평양시 대성구역에 있는 대성산성의 식량창고터유적도 있다.

대성산의 장수봉서남쪽 산중턱 경사진 곳에는 산경사면에 계단식으로 형성하였던 여러단의 축대가 있다. 북쪽에서 시작된 4단의 축대가 동남방향으로 280m정도 늘어져있고 제14호못의 남쪽부분에는 길이가 180~220m정도인 축대들이 산경사면을 따라 4단정도 더 축조되여있다. 매 단의 경사면길이는 20m정도이고 경사각은 북쪽부분에서 15°, 남쪽부분에서는 9.5°정도이다. 여기에는 지금도 고구려의 붉은색기와쪼각들이 많이 널려져있다.

유적의 남북길이는 약 300m, 동서길이는 200m정도로서 총면적은 약 6만m2에 달한다.

대성산성의 식량창고터유적
그림. 대성산성의 식량창고터유적

1950년대말-1960년대초 대성산성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발굴과정에 이 유적의 북쪽부분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였다. 이곳에는 땅속 1.5m깊이에 80m길이로 많은 량의 목재가 불에 탄 숯덩어리와 탄화된 낟알이 5~10㎝두께로 묻혀있고 그밖의 다른 문화층이 없으므로 고구려시기의 식량창고가 불에 탄것으로 인정되였다.

그후 여러 차례의 조사과정에 여기에서는 주추돌들과 문확돌, 축대의 수직면에 쌓았던 돌벽흔적이 발견되였다.

이 유적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여 고구려시기 대성산성에 있었던 식량창고는 장수봉서남쪽 산경사면에 여러단의 축대를 쌓고 그우에 기와지붕을 이은 목조건물로 된 개별적인 창고들과 축대 북쪽의 방화용못으로 구성되여있었으며 개별적인 창고들은 다락식건물이였다는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식량창고의 존재시기는 대성산성이 건설되였던 4세기말~5세기초부터 668년에 대성산성이 페성될 때까지로 볼수 있다.

당시의 문헌에는 고구려의 대성산성에 대하여 《수도는 평양성인데 그 성의 동서는 6리이며 남으로는 패수에 림했다. 성안에는 다만 로적가리와 창고가 있어 군수물자를 저장하였으며 적들이 들어오는 날에는 곧 들어가 굳건히 지켰다.》고 기록되여있다.(《주서》 권49 렬전 고구려)

이것은 고구려수도방위성이였던 대성산성안에 비상예비량곡과 같은 군수물자를 저장하여놓는 창고가 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고구려의 성들에는 군수물자를 저장하는 창고들이 있었는데 산성자산성의 2호문터주변에서 《천하창》(天下倉)이라고 씌여진 수기와가 여러점 발견된것으로 보아 산성자산성과 같은 수도방위성에 있던 창고들은 《천하의 창고》로 불리울만큼 그 규모가 방대하였음을 알수 있다.

고구려사람들은 대성산성에도 6만m2에 달하는 넓은 면적에 식량창고를 건설하여 성방어전에 필요한 량곡을 충분히 저장할수 있도록 하였던것이다.

대성산성에서 알려진 식량창고터유적은 고구려의 강대성과 량곡저장기술의 일면을 보여주는 귀중한 력사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