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률곡 리이와 소현서원

 2017.10.13.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앞으로 소현서원을 잘 보존관리하여 우리 나라 리조시기의 력사 특히 교육과 관련한 자료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는 민족문화유산이 적지 않지만 후대교육과 관련한 유산은 그리 많지 못합니다.》 (김정일전집》 제2권 66페지)

률곡 리이는 1564년에 과거급제한 후 청주목사, 황해감사, 대사간, 리조판서 등의 벼슬을 지냈다. 조선봉건왕조의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 리이는 당시 집권관료층의 반동적인 통치를 일정하게 비판하면서 불합리한 제도를 고치며 인민들에 대한 봉건적착취를 《조절》하고 교육을 발전시킬데 대하여서와 봉건국가의 방위력을 강화하기 위한 《10만양병설》 등을 제기하여 봉건통치를 적극 옹호하였다. 당쟁이 벌어지던 당시 리이는 동인과 서인사이의 싸움을 조정하려다가 실패하고 동인파세력의 배척을 받아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인 벽성으로 내려온 그는 후대들에게 봉건유교교육을 주고 학문연구를 위해 그곳에 있는 석담구곡에 소현서원을 세웠다.

우리 나라에서 서원은 지방의 량반, 관료들이 해당 지방과 인연이 있는 이름난 유학자, 봉건국가를 위하여 공로를 세운 장군 등의 사당을 세우고 량반자식들이 그들을 본받게 하며 봉건유교교육을 강화할 목적으로 16세기 중엽에 세워졌다. 그러나 서원은 설립목적과는 반대로 점차 량반토호들이 자기의 세력지반을 꾸리며 인민들의 재산을 략탈하고 부패한 생활을 일삼는 소굴로 변질되였다. 소현서원도 다른 서원들과 마찬가지였다.

소현서원은 석담천의 맑은 물이 아홉굽이(구곡)를 에돌아 내리면서 돌못(석담)을 이루는 산경치, 물경치가 뛰여나며 봄꽃과 짙은 록음, 붉은 단풍과 흰 눈꽃이 또한 사철 신비경을 펼쳐놓는 석담구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소인 다섯번째굽이의 《은병》(률곡 리이가 솔산이 담수에 숨어있는듯 하다고 하여 지은 이름)에 자리잡고있다.

소현서원은 서원의 둘레를 네모나게 둘러막고 그 안을 앞과 뒤의 두개 구역으로 구획지었는데 앞구역에는 강당이 있고 뒤구역에는 사당이 있으며 담장바깥 앞쪽에는 청계당(서쪽)과 요금정(동쪽)을 비롯한 여러채의 건물들이 있다.

처음 리이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청계당은 1575년에 세워지고 강당인 은병정사는 1578년에 건설되였다. 리이가 사망한 후 그를 비롯하여 송시렬, 김장생, 성혼 등 이름난 유학자들을 제사지내기 위한 사당이 세워졌다. 련이어 부속건물들이 더 세워져 비로소 서원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석담서원》으로 불리웠다. 1610년에 국왕인 광해군이 《소현서원》이라는 사액을 내려보내여 원래의 이름이 고쳐졌다.

서원의 사당앞에는 명필 김정희의 필체로 된 비가 세워져있는 《천조각》이 있다. 서원의 주변에 《요금정》(한변의 길이가 3m인 한칸짜리 정방형건물)도 있는데 이 루정은 당시 명필이며 거문고의 명수로 이름났던 리이의 누이동생 옥산이 리이에게 거문고를 들려주던 곳이라고 한다.

오늘 소현서원은 풍치수려한 주변의 경치와 어울려 옛 건물의 고색찬연함을 자랑하며 훌륭히 보존되고있다.

해방후 이곳에 오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옛건물들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수백년 묵은 나무도 잘 관리하며 나무가 적은데는 여러가지 나무를 더 심어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주체49(1960)년 9월과 주체63(1974)년 11월 이곳의 력사유적들을 돌아보시면서 민족문화유산들을 교양적가치가 있게 정리하여 근로자들을 교양하며 민족문화유산들과 오랜 나무들을 잘 보존할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한없이 숭고한 조국애와 민족애를 지니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멸의 업적을 전하며 오늘도 소현서원은 우리 당의 민족문화유산보존시책에 의하여 훌륭히 보존관리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