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해방직후 출판물에서 우리 글을 사용하도록 이끌어주신 현명한 령도

 2020.11.13.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당의 출판물은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인민대중을 위한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당의 출판물은 한자를 섞지 말고 인민들이 알아볼수 있는 국문활자로 인쇄하여야 합니다.》 (김일성전집》 증보판 제4권 234페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해방직후 조선인민의 서사생활에서 제기되는 절박한 요구를 제때에 통찰한데데 기초하시여 출판물에서 한자를 쓰지 말고 조선글자만을 쓸데 대한 강령적과업을 제시하시였다.

사람들의 언어생활에서 출판물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출판물에서 어떤 글자를 쓰는가 하는것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출판물에 자기의 민족글자를 쓰는가 아니면 다른 나라 글자를 쓰는가 하는것은 글말생활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하고 발전시키는가 아니면 그것을 줴버리는가 하는 중대한 문제로 된다.

조선인민은 자기의 훌륭한 민족글자를 가지고있다. 1444년에 창제된 훈민정음은 세상에서 뛰여난 민족글자로서 그 어떤 나라 발음이든지 다 잘 나타낼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대주의에 물젖은 조선봉건통치배들은 자기의 민족글자를 천시하고 한문을 숭상하면서 한자를 기본서사수단으로 리용하였다. 갑오개혁으로 1895년부터 관공서에서 국한문혼용을 법화하였으나 그것도 은을 내지 못하였다. 더구나 일제강점시기에는 조선말과 조선글이 놈들의 탄압대상으로 되였다.

일부 애국적인 언어학자들과 문필가들이 조선글만을 쓸것을 주장해나섰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조국이 해방된 후에도 의연히 서사생활에서는 한자가 많이 사용되였다. 일제의 간악한 식민지우매화정책으로 말미암아 조선에는 230여만의 문맹자가 생겨났다. 낫놓고 기윽자도 모르는 많은 문맹자를 없애는것도 힘에 겨운 일인데 일반서사생활에서 쓰이는 한자까지 배워준다는것은 참으로 힘에 부친 일이였다.

그러므로 해방직후 새 조국건설에 일떠선 조선인민들을 언어생활의 참다운 주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문맹을 퇴치하는것과 함께 서사생활에서 한자사용을 페지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업으로 나섰다.

출판물에서 조선글자만을 쓰도록 하는것은 우선 서사생활분야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살리기 위한 중요한 요구였다.

민족글자 훈민정음은 조선말의 구조적특성에 맞게 창제된 뛰여난 글자로서 조선말을 적는데 가장 알맞는 글자이다. 훈민정음을 버리고 한자와 같은 다른 나라 글자로 조선말을 적는것은 민족적자존심에 배치되는것으로서 주체가 서지 못한 표현이다. 한자는 뜻글자로서 하나의 글자가 하나의 소리마디를 나타내는것만큼 소리마디보다 낮은 발음단위는 나타낼수 없으며 낱소리글자에서처럼 여러가지 방법으로 글자들을 결합하여 다양한 말소리를 자유롭게 나타낼수 없다. 한자로서는 고유명사나 고유어, 토와 같은 말들은 잘 적을수 없다.이런 조건에서 조선말을 적는 수단으로 조선글자외에 한자사용을 허용하는것은 외래적인 요소를 허용하는것으로서 서사생활분야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살리기 위한 근본요구에 배치된다.

출판물에서 조선글자만을 쓰도록 하는것은 또한 서사생활에서 한자사용에 의한 부담을 덜고 서사생활의 주인이 되여 보다 쉬우면서도 효과적인 서사생활을 하려는 조선인민들의 절실한 념원과 지향을 풀어주기 위한 절박한 요구였다.

해방직후 광범한 근로대중속에는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데로부터 조선글자와 함께 한자를 섞어쓰고있던 당시의 환경에서 조선글자만 알고서는 출판물을 제대로 읽을수 없었으며 따라서 광범한 근로대중은 서사생활의 완전한 주인으로 될수 없었다.

혁명과 건설의 주인인 인민대중을 서사생활의 주인으로, 언어를 발전시키는 힘있는 존재로 키우는것은 조선로동당이 내세운 언어정책의 원칙적요구였다. 그렇다고 하여 광범한 근로자들에게 어렵고 생소한 한자를 배워주어 서사생활의 참다운 주인으로 내세울수는 없었다. 한자를 쓰지 않고 조선글자만 가지고서도 얼마든지 의사소통을 할수 있고 근로대중을 새 조국건설에 힘있게 고무추동할수 있는것만큼 한자를 쓰지 않고 조선글자만 쓰도록 하는 방향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였다.

출판물에서 조선글자만을 쓰도록 하는것은 또한 말과 글의 사회적기능을 더욱 높이기 위한 절실한 요구였다.

해방직후 위대한 수령님과 조선로동당의 현명한 령도로 민주주의가 철저히 구현된 나라의 새로운 현실은 말과 글의 사회적기능을 더욱 높일것을 요구하였다.

출판물에서 한자사용을 그만두고 조선글자만을 쓰게 하여야 조선글을 인민들속에 널리 보급시켜 그 사회적기능과 역할을 더욱 높이며 조선어의 자주적발전을 보장하고 우수성을 발양시킬수 있었다.

당시 말과 글의 사회적기능을 높이는데서 가장 큰 장애물은 한자와 한자어의 사용이였다. 한자의 사용은 한자어의 사용을 의미하며 새로운 한자어의 부단한 증대를 동반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자어의 정리와 함께 한자사용을 그만두어야 한자어정리자체를 잘할수 있으며 새로운 한자어의 증대를 미리 막을수 있었다. 한자사용을 페지하여야 고유한 입말을 조선글자로 쉽게 적을수 있게 하고 말과 글의 민족적특성을 높이 발양시키면서 동시에 자기의 사회적기능을 더욱 원만히 수행할수 있게 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해방직후 인민들의 서사생활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높이 발양시키는것이 가지는 의의를 깊이 통찰하신데 기초하시여 출판물에서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 조선글자만을 쓸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시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을 현명하게 조직령도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선 광범한 근로대중을 새 조국건설에로 조직동원해야 할 사명을 지닌 당보에서부터 한자를 쓰지 말며 정규학교와 성인학교의 교과서를 비롯한 여러 출판물들에서 점차적으로 한자를 쓰지 않도록 대책을 취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5(1946)년 1월 11일 황해남도 해주지구에 대한 현지지도를 하실 때 그처럼 바쁘신 가운데서도 신문 《자유황해》의 주필을 만나시여 신문의 편집방향과 계급적성격 그리고 신문기자들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면서 신문에 어려운 한자와 한문투의 말이 많은것 같은데 신문을 발행하는 목적이 광범한 대중을 교양하자는데 있는것만큼 기사를 누구나 다 읽고 리해할수 있게 조선글로 알기 쉽게 써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또한 해방직후 전군중적운동으로 힘있게 벌어지고있던 문맹퇴치운동과 함께 출판물에서 한자를 쓰지 않고 조선글자만을 쓰기 위한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리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6(1947)년 12월 26일 김일성종합대학 력사문학부(당시) 교원들과 하신 담화에서 조선인민의 절대다수가 아직 문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조건에서 출판물에 될수록 한자를 쓰지 말고 조선글로 쓰는것이 좋다고 하시면서 한자를 써온 력사가 오랜것만큼 점차적으로 쓰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직후 신문사나 출판사들을 현지지도하실 때만이 아니라 온 나라 방방곡곡을 현지지도하시는 그 바쁘신 가운데서도 로동자, 농민들이 제기하는 소박한 의견도 중요한 정책적문제로 보시고 신문에서 한자를 쓰지 않도록 여러차례에 걸쳐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7(1948)년 1월 12일 당시의 평안북도 강계군 시중면 안찬동에 내려가시여 농민들의 농사일과 생활형편에 대하여 친어버이심정으로 보살피시면서 그곳 농민들이 문맹을 퇴치하여 조선글을 읽게 되였으나 신문에서 한자를 계속 쓰고있기때문에 불편을 느끼고있다는 사실을 료해하시고 조선글로 신문을 내도록 대책을 세워주시는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로부터 이틀째 되는 주체37(1948)년 1월 14일에 조선어문연구회 위원장을 만나시여 지금처럼 한자를 많이 섞어쓰면 인민들이 글을 보고도 그 뜻을 리해하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될수록 한자를 쓰지 말고 조선말과 글을 살려쓰도록 하여야 한다고 간곡하게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며칠후인 주체37(1948)년 2월 8일 민주조선사를 현지지도하시면서 일군들과 하신 담화에서도 신문에 한자가 너무 많다고 하시면서 될수록 한자를 쓰지 말고 누구나 다 보고 쉽게 리해할수 있는 조선글자를 써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관철하기 위한 투쟁은 무엇보다먼저 당보와 당기관지의 편집일군들속에서 세차게 일어났으며 뒤이어 학교 교과서와 교재집필에서도 구현되여나갔다. 그리하여 주체35(1946)년 봄부터 당보와 당기관지, 초등학교 교과서들은 한자를 쓰지 않고 조선글로만 편집발행되였다. 주체37(1948)년에 들어서면서 출판물에서 한자를 쓰지 않고 조선글자만을 쓰기 위한 운동은 더욱 줄기차게 벌어져 그해말에는 거의 모든 출판물들에서 한자를 쓰지 않게 되였다.

다만 과학기술분야의 론문들과 민족고전을 다루는 글에서 한자를 섞어쓰고있었으며 어려운 한자말과 소리같은말, 고장이름과 사람이름 등에 한하여서만 쓰이고있었다. 이에 기초하여 주체37(1948)년말부터 한자사용을 완전히 페지하기 위한 투쟁을 벌리여 주체38(1949)년 봄부터는 모든 출판물에서 조선글자에 의한 단일한 서사체계를 확립할수 있었다.

출판물에서 한자를 쓰지 않고 조선글자에 의한 단일한 서사체계를 확립한것은 인민들의 서사생활과 조선어발전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하고 구현한것으로서 참으로 거대한 의의를 가진다.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근로대중이 자주적인 서사생활에 적극 참가할수 있게 되고 조선어의 사회적기능이 더욱 높아지게 되였으며 조선어의 주체적발전에 유리한 언어적환경이 마련되게 되였다.

이처럼 출판물에서 한자를 쓰지 않고 조선글자만을 쓸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독창적인 언어사상과 정력적인 령도에 의하여 조선글자에 의한 단일한 서사체계가 확립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