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박사 부교수 박금순
2025.3.4.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지난 시기 당과 혁명에 충실하였던 허정숙동무를 늘 잊지 않고계십니다.
동무는 해방직후부터 위대한 수령님을 몸가까이 모시고 진심으로 받들면서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조선로동당 제7차대회에서 당과 수령을 높이 받들고 주체혁명위업의 승리를 위하여, 조국의 부강번영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 일한 전사들과 함께 허정숙동지의 공로도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허정숙동지는 초대 문화선전상으로서 우리 나라에서 첫 녀성상, 녀성대의원이였다.
허정숙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품속에서 인생을 빛내여 온 녀성혁명가였다.
1908년 애국적인 변호사 가정에서 명망높던 허헌선생의 맏딸로 태여난 그는 일찌기 일본과 미국을 건너다니며 《선진사조》와도 접촉하였고 처녀시절부터 《동아일보》의 녀류기자로 활동하면서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하여 제나름의 항거도 하였으며 1929년부터 반일지하투쟁에 참가하여 광주학생사건, 조선공산당 재건사건 등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출옥후 1935년부터 로동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36년 11월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동만과 남만에서 조직선을 찾다가 일제군경의 추격을 받고 중국관내에 들어갔다. 1937년 8월부터 연안의 항일군정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그해 11월부터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파쟁의 소용돌이와 탄압의 칼부림속에서 국내공산주의운동이 쇠퇴몰락의 일로를 걷고있을 때 조선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조선의 정신도, 조선의 심장도 살아있다는것을 만천하에 시위한 보천보의 총성, 그 총성과 함께 국내외로 급속히 파급된 항일의 전설적영웅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는 허정숙동지의 가슴에 새로운 투쟁의 희열과 활력을 부어주었다.
허정숙동지는 곡절많은 풍운의 길에서 종파분자들의 권력야욕에 진저리나는 염증을 느끼고 혁명을 위해서라면 가정도 행복도 다 바치며 오직 한분 민족의 영명한 지도자를 갈망하여 해방후 아버지와 자식들이 있는 곳이 아니라 위대한 수령님의 품을 찾아왔다.
1945년 12월초 조국에 귀국하여 위대한 수령님을 처음으로 만나뵙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아안은 허정숙동지는 해방후 우리 당의 기관지인 《정로》사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누구보다도 위대한 수령님의 각별한 사랑을 많이 받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에 돌아왔어도 혈혈단신으로 한적한 합숙방에서 고독하게 생활하는 그에게 새로 지은 양복과 조선옷을 보내주시고 앓고있을 때에는 온갖 치료대책을 세워주시여 의사들도 살릴 가망이 없다고 하던 그의 생명을 구원해주시였으며 오래동안 떨어져 살아온 사랑하는 아들과 십여년만에 상봉할수 있게 해주시였다.
일찌기 어머니와 남편을 잃고 아버지에게 자식들까지 맡기고 단연 투쟁의 길에 나서서 이역의 험준한 산발을 헤쳐갈 때에도 그는 녀성으로서 받아야 할 보호를 받아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심한 친어버이의 사랑으로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시고 마음속그늘도 가셔주고 보살펴주시였으며 당과 조국을 아는 문필가로, 녀성일군으로 키워주시였다.
우리 민족의 영명한 지도자이신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글을 쓰는것을 당보기자들의 첫째가는 사명으로, 본분으로 자각한 허정숙동지는 1945년 12월 21일 《정로》 9호 1면에 처음으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초상사진문헌을 정중히 모시고 특집기사 《김일성동지의 빛나는 투쟁사》를 실었다.
허정숙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뜨거운 사랑과 믿음속에서 1946년 2월부터 당중앙조직위원회 선전부 부부장 등 여러 중요직책에서 일하다가 1948년 9월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선전상으로 사업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첫 최고인민회의를 앞두고 내각성원들을 선정할 때 허정숙동지를 추천하시였다.
일부 일군들이 우리보다 먼저 혁명을 한 형제나라에도 아직 그런 전례가 없다고 하면서 난색을 표시하였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단순히 녀자라는것으로 하여 한 부문을 책임지고 지도할수 있겠는가를 의문에 붙여서는 안되며 다른 형제나라에도 그런 실례가 없으니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할수 있겠는가고 생각해서도 안된다고, 당과 혁명에 대한 립장이 투철하고 사업능력과 경험, 군중의 신망이 있는 일군이면 비록 녀성이라 하더라도 책임적인 직무를 능히 감당해낼수 있다고, 그리고 다른 나라에 없으니 우리 나라에도 녀자상이 있어서 안된다는 법은 없다고 하시면서 허정숙동지를 추천하시였다.
이처럼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사랑과 믿음으로 허정숙동지는 그밖에도 대외문화련락위원회 위원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 조선민주녀성동맹(당시) 중앙위원회 비서장의 책임적인 사업도 맡아하였다.
믿음과 변함없는 의리속에 국가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던 허정숙동지는 61살이 되던 1968년 4월 년로보장으로 집으로 들어오게 되였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년로보장을 받은지 4년이 되던 해 허정숙동지에게 중요한 혁명임무를 맡겨주시는 크나큰 믿음을 베푸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허정숙동지가 다시 일을 시작한 때로부터 근 10년이 되여오던 1981년 11월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부장으로 임명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허정숙동무는 나와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일해온 당과 혁명에 충실한 혁명가이며 경험도 있고 이름도 널리 알려진 동무라고, 해방직후부터 일하던 간부들가운데 그만한 녀성혁명가가 없다고, 중요한 사업을 맡겨 여생을 빛내이게 하자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뜻을 받들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허정숙동지가 일을 잘하도록 힘과 용기도 주시고 사랑의 선물도 안겨주시며 걸음걸음 이끌어주시였다.
이런 크나큰 사랑과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80고령을 넘긴 생애의 마지막날까지 맡겨진 혁명임무를 훌륭히 수행할수 있었다.
정녕 허정숙동지의 한생은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과 믿음속에 빛내여 온 가장 영광스럽고 긍지높은 생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