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발해는 고구려유민들이 세운 나라

 2019.3.14.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 7세기말부터 10세기초에 이르는 시기에 우리 나라 력사발전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김정일전집》 제2권 163페지)

698년부터 926년까지 200여년간이나 해동성국으로 우리 나라 력사발전에서 커다란 역할을 한 발해는 고구려유민들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였다.

발해가 고구려유민들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였다는것은 우선 684년에 세워진 발해의 전신국가 진국(振國)이 고구려유민들에 의하여 건국된 사실에서 찾아볼수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렬전에는 678년에 고구려의 《잔얼》(잔여세력)들이 한데 뭉쳐 북쪽 태백산(백두산)아래에 자리를 잡고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다는 기사가 실려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신라고기》를 인용하여 고구려의 옛 장수 대조영이 《잔병》(남은 군사)들을 모아 태백산《남쪽(북쪽을 잘못 쓴것임)》에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다는것을 주석의 형식으로 전하고있다. 《제왕운기》에서도 같은 사실을 전하면서 그것이 칙천무후 원년 갑신 즉 684년에 해당한다는것을 밝혀놓았다.

발해의 건국시기는 《류취국사》에 명백히 기록되여있는바와 같이 698년이다.

그런데 앞에서 서술한바와 같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제왕운기》를 비롯한 우리 나라 력사책들의 기록에는 발해의 건국년대가 678년, 684년으로 되여있다. 678년, 684년이 발해건국의 정식년대가 아니라는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영주지방 고구려유민들의 폭동이 696년에 일어났고 또 698년에 발해국이 성립되였다는것이 《류취국사》에 뚜렷이 나타나기때문이다.

그러나 발해건국시기와 관련된 우리 나라의 옛 력사책들의 기록도 일정한 력사적사실을 반영하고있다. 그 력사적사실은 698년 대조영이 발해를 세우기에 앞서 그 전신국가가 출현된것이다. 678년, 684년을 대조영의 발해국가창건과 결부시켜놓은 사실이 그것을 시사하여준다.

이 발해전신국의 이름은 《구당서》, 《신당서》 등에 보이는 《진국》으로 비정된다. 발해국의 건국년대로 전해지는 678년, 684년을 이렇게 진국과 관련된 년대로 바로잡으면 결국 발해국을 세웠다는 《고구려의 잔얼》, 《잔병》들도 발해의 전신국이였던 진국을 세운 사람들을 가리킨것으로 된다. 이것은 진국을 세운 사람들이 고구려유민들이였다는것을 확증하여준다.

발해가 고구려유민들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였다는것은 또한 진국에 토대하여 698년에 세워진 발해가 고구려유민들에 의하여 세워진 사실에서 찾아볼수 있다.

발해건국에서 전환적국면을 열어놓은것은 대조영의 지휘밑에 벌어진 영주지방 고구려유민들의 투쟁이였다. 698년 5월 영주지방(조양)에 이주하여 살고있던 고구려유민들은 거란인, 말갈인들과 합세하여 대규모적인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에 궐기한 여러 민족, 종족들은 다같이 당나라침략자들을 상대로 싸움에 일떠섰지만 그들이 추구한 구체적인 목적은 서로 달랐다. 고구려사람들은 당나라침략자들을 짓부시고 료동으로 진출하여 고구려국가를 회복할 큰 뜻을 품고있었다.

폭동군은 침략군의 아성인 영주성을 들이쳐 도독을 처단하고 이 일대의 당나라군을 격파한 다음 다시 동, 서 두 방면으로 진격을 개시하였는데 동부전선에서 주력을 이룬것은 고구려사람들이였다. 고구려의 옛 장수 대조영이 지휘하는 고구려폭동군은 서쪽으로 진출한 거란인부대와는 관계없이 활동하였다. 대조영이 거느린 고구려인 부대는 걸사비우가 지휘하던 말갈인부대와 련합하여 싸웠다. 고구려인부대와 말갈인부대는 불과 몇달동안에 영주의 동쪽과 동남쪽의 많은 지역들을 점령하면서 동쪽으로 진출할 준비를 갖추었다. 고구려군은 697년 4월경에 돌궐의 무력간섭으로 말미암아 서부전선을 맡고있던 거란인부대가 격파되고 전반적정세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 매우 어려운 정황속에서도 투쟁을 계속 확대하였다.

거란의 붕괴로 숨을 돌리게 된 당나라가 대군을 내몰아 동부전선으로 밀려들었다. 당나라군은 처음 말갈인부대와 맞다들었다. 말갈인군사들은 적을 맞받아 용감히 싸웠으나 력량상차이로 부대는 격파되고 그 지휘자 걸사비우도 전사하였다. 고구려군의 지휘자인 대조영은 분산된 말갈인들을 수습하여 자기의 부대에 포함시킨 다음에 옛 고구려땅을 향해 진격의 길에 올랐다.

고구려군은 말갈인부대를 격파한 당나라침략군이 기세등등하여 추격해오자 천문령(오늘의 로합하의 북쪽 300리지점)에서 매복기습전으로 적들을 거의 소멸하였다.

천문령전투를 계기로 고구려군의 사기는 고조되고 적들은 완전히 기가 꺾이워 다시는 추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천문령전투에서 결정적승리를 이룩한 고구려군은 계속 동쪽으로 진군하여 료하, 송화강을 건너 동모산(오늘의 돈화부근)에 자리를 잡았다. 대조영이 거느린 고구려군의 줄기찬 투쟁에 의하여 료하동쪽의 넓은 지대가 고구려유민들의 수중에 장악되고 옛 고구려령역안의 광범한 유민들도 급속히 집결되였다.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세력집단은 이미 이룩된 군사적승리와 정치적력량관계에 기초하여 698년에 진국을 포섭하고 통일적인 발해국의 창건을 선포하였다.

제반 사실은 발해가 고구려유민들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였다는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