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여난 슬기와 재능을 가진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과학과 기술, 문학과 예술을 높이 발전시켜 나라의 명성을 떨쳤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문화적재부들가운데는 세계문화의 보물고를 풍부히 하는데 기여한 창조물이 적지 않습니다.》 (
예로부터 아름다운 금수강산에서 살아온 슬기롭고 지혜로운 우리 인민은 력사적으로 내려오면서 풍부한 민족문화를 창조하였다.
우리 민족의 창조한 미술유산들속에는 오늘날 세계 여러 나라의 미술박물관, 력사박물관들에 적지 않게 전시되여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있는 고려시기의 회화작품들도 있다.
고려는 우리 나라의 첫 봉건국가였던 고구려를 계승하여 정치와 경제, 군사와 문화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상당한 발전의 길을 걸어 《고려》(《corea, coro》)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다.
이 글에서는 고려시기의 회화유산이 중세동방문화의 보물로 되는 근거와 우수성에 대하여 밝히려고 한다.
고려시기의 회화유산이 중세동방예술의 보물로 되는것은 첫째로, 묘사대상이 정교하고 다양하게 그려졌기때문이다.
고려시기의 회화유산들은 묘사대상에서 사실주의적색채가 짙은것이 특징이다.
고려에서는 묘사대상을 진실하고 사실주의적으로 형상하여 회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 대표적인 화가가 리녕이였다. 리녕은 고려의 제17대왕이였던 인종(1123‐1146년)시기에 활동한 궁중화가로서 그림을 잘 그렸을뿐아니라 송나라에 가서 휘종왕의 부탁으로 궁중화가들에게 그림을 배워주기까지 하였다. 그가 얼마나 그림을 잘 그렸는가 하는것은 풍경화 《례성강도》를 통해 잘 알수 있다. 이 그림이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력사기록에 의하면 《례성강도》는 1124년에 리녕이 송나라왕의 간청에 못이겨 그려준것이였다고 한다.
그림은 당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의 앞을 지나가는 아름다운 례성강의 자연풍치를 생동한 사실주의적화풍으로 훌륭하게 묘사한것이다.
리녕이 이 그림을 얼마나 생동하고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였던지 송나라왕 휘종은 《근래에 고려의 화공으로서 사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묘수(뛰여난 재간을 가진 사람)를 가진 사람은 오직 리녕뿐이다.》고 하면서 술과 음식, 각종 비단을 상으로 주었다는 기록은 《례성강도》가 생동하게 묘사되여있었다는것을 그대로 엿볼수 있게 하고있다. 이 그림은 송나라사람들의 커다란 탄복을 불러일으켰는데 자존심이 강한 휘종도 많은 선물을 주면서 리녕에게 그 화법(조선화)을 자기 나라 궁전화가들에게 배워줄것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고려에서는 묘사대상을 환상적으로가 아니라 실지 있는 그대로 화폭에 담음으로써 작품들이 기름지고 강한 감화력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전통적인 조선화에 그 바탕을 두고있기때문이였다.
고려에서 이와 같은 사실주의적인 묘사대상들이 그려지게 된것은 전문적인 미술창작기관들에 종사하는 화가들과 인민들이 적극적인 창작활동을 벌린것과 관련되여있다. 실제로 고려시기의 력사기록인 리인로의 《동문선》에는 《화국(화가) 박자윤을 시켜 여러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것을 조정과 가정들에 걸어두게 하였다.》라고 되여있다.
고려가 존재하던 시기에는 고려뿐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종교미술이 주류를 이루고있던 시기였다.
종교는 미술로 하여금 현실세계가 아니라 추상적인 종교적그림만을 일방적으로 묘사할것을 강요하였으며 결국 거의 모든 미술작품들에 도식적인 모습을 낳게 하였다. 특히 종교미술은 실제적인 인간의 사실주의적형태를 거부하고 신비한 신들의 묘사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러한 시대적사조는 고려에서도 다를바 없었다. 고려에서 회화는 동양의 여러 나라들에서와 같이 불교가 지배적인것으로 되여있기때문에 불교화가 압도적비중을 차지하고있었다. 불교화는 사명과 기능, 내용과 형식, 재료 등에 의하여 여러 갈래로 갈라졌는데 절의 벽에 그린것, 족자형으로 그린것, 책의 속표지와 삽화로 그린것, 세화기법으로 그린것 등 실로 각양각색이였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종교적영향을 받은 회화라고 하여도 인물과 풍경화에서 산인간과 실제한 자연풍경을 묘사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창작되였으며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발전된 상태에 있었다. 이에 대하여서는 고려와 거의 같은 시대에 존재해있던 송나라의 이름있는 화가이며 평론가인 곽야허가 1070년에 쓴 《도화견문지》라는 책에는 《회화의 정묘함은 고려의 고유한것이다.》라고 지적되여있는데 이것은 고려회화가 묘사대상의 선택에서 송나라를 앞도할만큼 높은 수준에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게 하고있다.
고려시기의 회화유산은 일본에 수많이 소장되여있다.
일본에 있는 고려시기의 회화유산들은 비록 시대적제한성으로 하여 불교를 주제로 한 그림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있으나 묘사대상이 다양하고 형상에서 사실주의적인 세련된 묘사수법들이 구현되고있는것으로 하여 중세동양예술의 보물로 인정되고있다.
오늘 일본뿐아니라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보스톤회화관》 프랑스 빠리에 있는 《기메박물관》, 벨지끄의 《브류셀미술관》, 네데를란드의 《국립박물관》과 영국의 《대영박물관》, 《빅토리아 앤드얼버트박물관》 그리고 도이췰란드의 《켈른동양회화관》을 비롯한 미국과 유럽의 여러 박물관, 회화관들에도 고려시기의 회화작품들이 적지 않게 소장되여있는것은 고려의 회화작품들이 당대 어느 나라에서도 그려낼수 없는 걸작으로 되여있었기때문이다.
고려시기의 회화유산이 중세동방예술의 보물로 되는것은 둘째로, 당시 세계의 회화작품들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아름다운 색채를 사용하여 그렸기때문이다.
고려시기 회화에서 특징적인것은 진채세화가 넓은 범위에서 쓰인것이다.
진채세화는 진하게 쓰는 투명하지 않는 색감으로 그린 그림을 말하는데 당시 중국이나 유럽에서는 이것이 회화에 도입되지 못하였다.
진채세화로 그린 그림들에서는 선들이 보다 뚜렷한 대조를 이루면서 강조되고 본색을 위주로 통일시키면서 간결하고 맑고 선명한 색갈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배경을 록색과 같은 무게있는 어두운 색으로 칠하여 묘사의 중심을 강조하고 배경과 바깥부분은 어둡게, 얼굴가까이는 연하게 하여 공간감을 주면서도 세부묘사에서 채색의 농담으로 립체감을 두드러지게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림들이 얼마나 커다란 감흥을 불러일으켰던지 송나라시기에 활동한 화가이며 평론가인 곽야허는 자기 나라에 들어온 고려의 회화작품들을 깊이 연구하고 그 색채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1070년에 회화와 관련한 도서를 집필하였는데 거기에 《고려의 회화는 색이 독특하다.》고 특별히 쪼아박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당시 고려에서 널리 써온 진채세화가 얼마나 격이 높았는가를 잘 보여주는 뚜렷한 실례의 하나라고 말할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의 채색화에 그 뿌리를 두고 더욱 정묘하게 발전시킨 고려시기의 진채세화는 당시 세계 어느 나라에서 찾아볼수 없는것이였다.
고려시기의 회화유산이 중세동방예술의 보물로 되는것은 셋째로,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독특한 회화적기법을 활용하여 그렸기때문이다.
조선화법의 기본특징은 함축하고 집중하는것이다.
조선화에서는 선묘법, 색묘법, 구도법, 원근화법이 다 함축과 집중의 원리에 기초하고있으며 조선화의 묘사원리는 특이한 기법을 동반하고있다. 몰골기법, 선묘기법 같은것은 조선화의 묘사원리를 구현한 전통적인 기법이다. 함축하고 집중하는 조선화의 조형원리는 묘사대상의 본질을 명료하게 돋구어내며 적게 그리여 많은것을 느끼게 할뿐아니라 색채형상과 간결하면서도 조화롭게 그려진 형태는 다 함축과 집중의 원리에 기초하고있다. 이런것으로 하여 조선화는 조선민족의 예술적특징을 훌륭히 보여주고있다.
12세기 후반기부터 15세기 중엽까지의 기간에 유럽에서는 꼬띠크라고 불리우는 종교미술이 지배하였는데 이 말은 문예부흥기에 인문주의자들이 미개한 고트종족의 미술이라고 멸시하여 부른데로부터 유래되였고 거기에서 기본은 건축이였지만 회화에서도 색유리그림과 《미니아츄트》(손으로 쓴 책에 직접 그린 치례그림과 받침그림)였다.
이 그림들은 함축과 집중의 기법이라고는 찾아볼수 없고 일반적인 자연현상들과 인간의 화상을 단순하게 보여주는데 그치였다.
고려시기에 다양한 기법들이 안받침된 그림들이 창작되여 세계를 경탄시킨 사실은 다음의 자료들을 통하여 잘 알수 있다. 일제가 조선에 대한 침략책동을 벌리고 있던 때인 1903년 2월에 《고고계》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경상남도 통도사라는 절에 있던 불교그림을 요란스럽게 소개한적이 있었다. 그에 의하면 《이 조선불화는 원래 경상남도 통도사에 있었던것이다. 보살 2상, 천부수호신상 같은것도 있다. 더우기 악기를 든 보살상도 있다. 그림이 그려진 시대는 수백년전으로 추정되며 색이 선명하고 기법이 뛰여나 한눈에 보기에도 가치가 있는 불교미술품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이 그림은 너무 진귀해서 일본의 도꾜제실박물관에 전시하여 연구를 한다는 기사까지 실었다. 또한 도꾜 히노하라 가문에 소장되여있는 《11면관음상》에 대하여서도 오오까라는 자는 《조선의 회화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이 그림이 《묘사가 정교하고 색채가 아름다운것은 놀랄만한것이다. 면모는 조선회화의 특징인 풍만함속에 쾌활한 기상을 나타내고있으며 모든 미술적기교를 발휘하고있는 비범한 대작》이라고 격찬하였다.
이것은 고려시기에 그려진 그림들이 매우 독특한 기법으로 형상되였다는것을 그대로 실증해주고있다.
이처럼 고려시기의 회화유산들은 당시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것으로서 중세동양미술의 보물고를 풍부히 하는데 기여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