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세계문화유산-개성의 숭양서원

 2023.5.15.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력사유적유물들은 우리 선조들이 투쟁과 창조적활동을 통하여 이룩한 귀중한 유산이며 후세에 길이 전해갈 민족의 재부입니다.》

우리 민족의 슬기와 재능이 깃들어있는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중에는 개성에 세워진 숭양서원도 있다.

개성시 선죽동에 자리잡고있는 숭양서원은 고려말기의 대관료이며 이름난 유학자인 정몽주가 살던 집자리에 세운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지방사설교육기관이였다.

성균관 박사, 밀직제학, 정당문학 등의 벼슬을 지낸 정몽주가 권력야심가인 리성계일파에 의해 1392년 4월에 살해당하자 개성사람들은 그를 추모하여 그의 집에 사당(문충당)을 세웠다.

이 서원은 1573년(선조 6년) 개성류수 남응운이 세운것으로서 처음에는 정몽주의 시호를 붙여 문충당이라고 부르다가 1575년(선조 8년)에 선조왕으로부터 《숭양서원》이라는 현판을 받게 되면서 현재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숭양서원에서는 정몽주에 대한 제사를 진행하는 동시에 개성지방의 량반자식들에게 유교교육도 주었다.

사당에서는 정몽주와 고려의 시중이였던 우현보, 개성출신인 서경덕과 김육 등 여러 사람들의 제사를 지냈다.

사당앞뜰 좌우에는 두개의 비석이 서있다. 건물을 향하여 우측(북쪽)의것은 1611년(광해군 3년)에 세운 묘정비(廟庭碑: 종묘)로서 정몽주의 생애와 활동에 대하여 그리고 좌측(남쪽)의것은 1871년(고종 8년)에 세운 숭양서원기실비(紀實碑)로서 대원군의 서원철페조치이후에도 이 서원이 그대로 유지보존되게 된 래력이 기록되여있다.

숭양서원
사진. 숭양서원

숭양서원은 비록 봉건유교교육을 강화할 목적으로 세워졌지만 개성에 남아있는 옛 건물들가운데서 가장 오랜 건물의 하나이며 서원의 전형적인 배치형식과 건축구조를 그대로 보존하고있는 귀중한 력사유적이다.

사당은 1.3m의 높은 밑단우에 앞면 4간(9.43m), 옆면 2간(4.83m)으로 되여있다. 잘 다듬은 흘림기둥에 두공이 없으며 겹처마형식의 배집지붕을 이었다.

강당은 앞면 5간(12.79m), 옆면 3간(6.96m)으로서 높이 1.6m되는 밑단우에 세워졌다. 잘 다듬은 흘림기둥에 두공이 없으며 홑처마형식의 합각지붕을 이었다. 강당의 가운데에는 마루를 깔고 량쪽 방에는 온돌을 설치하였다.

당시 서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의 합숙으로 쓰인 동재와 서재는 두공이 없는 배집지붕의 건물로서 앞면 6간, 옆면 2간으로 규모가 큰 건물들이다.

숭양서원은 조선봉건왕조시기 지방의 교육형편과 서원의 건축형식을 보여주며 정몽주와 관련된 전설이 깃들어있어 널리 알려진 유적의 하나이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미제침략자들에 의하여 심히 파괴되였으나 전후 우리 당의 옳바른 문화유물보존정책에 의하여 숭양서원은 옛 모습을 다시 찾게 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주체76(1987)년 8월 개성시안에 있는 옛 건물들의 실태를 료해하시고 숭양서원을 잘 보수, 정비하여 보여주도록 하시였다.

2013년 6월 23일 캄보쟈의 프놈 뻰에서 진행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37차회의에서는 숭양서원을 비롯한 개성시의 력사유적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였다.

숭양서원을 비롯한 개성시의 력사유적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정식 등록된것은 그 력사문화적가치에 대한 국제적인 공인으로 되며 이로 하여 우리 나라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가 세계적으로 크게 알려지게 되였다.

오늘 세계문화유산-숭양서원은 력사의 도시 개성의 문화유적으로 잘 보존관리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