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 박사 부교수 리병간
2025.5.1.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새 세대들도 당과 수령에게 끝없이 충실하였던 전세대들처럼 한생을 빛나게 살도록 교양하여야 합니다.》
우리 공화국의 70여년력사에는 당의 은혜로운 품속에서 조국과 인민이 사랑하는 세계적인 대문호로 성장한 백인준선생의 이름도 새겨져있다.
1920년 10월 운산군의 산골마을에서 태여난 백인준선생은 청년시절 시창작에 뜻을 두었지만 식민지청년이라는 설음과 함께 이끌어주는 손길이 없고 옳바른 창작리념이 없은 탓에 암중모색하며 방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러한 그가 작가로서 참된 인생의 새 출발을 하게 된것은 해방후부터였다.
백인준선생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내놓으신 새 조국건설로선을 무한한 감동속에 접한 후 수령님의 위대성을 찬양한 태양송가를 발표하는것으로서 자기의 참다운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첫 작품을 창작한데 이어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업적과 수령님의 품속에서 끝없는 행복을 누리는 우리 인민의 생활을 노래한 시들을 묶어 시집 《인민의 노래》를 처음으로 내놓았다.
그후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탄생 40돐에 드리는 시 《크나큰 그 이름 불러》를 비롯하여 조국해방전쟁시기에 창작한 시들을 묶은 두번째 시집 《소박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내놓았다.
그 하나하나의 작품들은 수령의 위대성에 진심으로 매혹되고 조국의 귀중함을 사무치게 절감한 그의 마음속에서 분출된 뜨거운 고백이였다.
언제인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조선예술영화 《이름없는 영웅들》을 지도하시면서 조국에 대한 시를 지으라는 과업을 주시였을 때 그는 그이께서 바라시는 조국에 대한 시는 어떤 시이겠는가를 두고 사색하고 더듬어보면서 이틀동안에 서정시 《조국에 대한 생각》을 명작으로 완성함으로써 장군님께서 주신 과업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이처럼 당에 충실하였기에 백인준선생은 당에서 시를 지으라고 하면 시를, 가극대본을 쓰라면 가극대본을, 영화문학을 창작하라고 하면 영화문학을 쓸수 있는 뛰여난 실력을 지닐수 있었던것이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문학예술작품창작에서 그가 이룩한 커다란 성과를 높이 평가해주시고 백인준동무는 어버이수령님의 손길아래서 자라난 대문호라고 하시며 영광의 단상에 내세워주시였다.
김일성훈장수훈자, 김일성상계관인, 로력영웅으로 내세워주신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창작사업에 자기의 열정을 깡그리 바쳐가던 그는 그만 불치의 병으로 하여 자기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알면서도 장군님께 드리는 노래의 가사창작에 달라붙었다.
혁명적신념이 투철한 작가의 창작생활은 시작도 마감도 한모습이다.
백인준선생은 수십년의 창작생활과정에 많은 작품을 내놓았을뿐 아니라 이렇게 생의 마지막나날에도 창작을 중단하지 않았던것이다.
1999년 1월 식을줄 모르는 창작적열정으로 높뛰던 그의 심장이 멎었을 때 책상우에는 완성된 가사인 《인민은 그 품에 길이 살리라》가 정히 놓여있었다.
그는 혁명하는 길에서는 살아도 영광, 죽어도 영광이다, 총잡은 병사는 결전장에서 쓰러지는것이지 베개를 베고 죽지 않는다, 펜을 잡은 작가는 마지막까지 글을 써야 한다고 하면서 창작사업을 진행하였다.
애국자가 아닌 작가가 애국적인 작품을 쓸수 없으며 혁명가가 아닌 작가가 혁명적인 작품을 쓸수 없다.
불굴의 의지로 그가 쓴 가사 《인민은 그 품에 길이 살리라》에는 《로동당시대로 영원한 나라 주체의 이 땅에 부강하리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은 혁명적신념과 의지가 확고한 작가만이 쓸수 있는것이다.
하기에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조선로동당 제7차대회의 높은 연단에서 조국과 인민을 위한 길에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친 충신, 애국자중의 한사람으로 백인준선생의 이름도 불러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정녕 위대한 수령, 은혜로운 당의 품속에서 세계적인 대문호로 성장한 백인준선생의 삶은 조선인민의 영원한 사랑과 존경속에 오늘도 빛을 뿌리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