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적인 항일무장투쟁은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에서 가장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는 영광스러운 혁명투쟁이였다.
《항일무장투쟁은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주류이며 그의 가장 높은 형태이다.》 (
일반적으로 사회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는 각이한 리해관계를 가진 여러 계급, 계층이 참가하는 여러가지 형태의 사회적운동이 벌어지게 되며 그것들은 력사발전을 추동하는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지난 시기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무대에도 여러 갈래의 반일세력들과 투쟁조류들이 등장하였다. 따라서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사전반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하여서는 그것들이 차지하는 지위를 옳바로 인식하는것이 중요하다.
항일무장투쟁은 한마디로 말하여 우리 나라에서 벌어진 여러 갈래의 반일투쟁조류들가운데서 주류를 이룬 혁명투쟁으로서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짓부시고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실현하는데서 가장 적극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 최고형태의 투쟁이였다. 여기에 바로 항일무장투쟁이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에서 차지하는 력사적지위가 있다.
항일무장투쟁이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주류로, 가장 높은 형태로서의 지위를 차지하는것은 무엇보다도 이 투쟁이 탁월한 수령의 령도밑에 가장 과학적인 전략전술에 의하여 조직전개되였다는데 있다.
일정한 사회력사적운동 특히 심각한 사회적변혁을 위한 혁명투쟁의 지위를 규정하는데서 나서는 원칙적문제는 그것이 탁월한 수령의 령도를 받았는가 받지 못하였는가 하는것이다. 원래 혁명투쟁에서 수령문제는 기본핵을 이룬다. 인민대중이 혁명투쟁에서 승리하자면 혁명의 지도사상과 전략전술을 제시하고 단결을 실현하는 사상리론의 중심, 단결의 중심이 있어야 한다. 그 중심이 바로 수령이다.
지난날 우리 나라 민족해방운동선상에 존재하였던 여러 반일세력들의 투쟁이 옳바른 길을 개척하지 못하고 민족해방투쟁의 주류로 발전할수 없었던것은 탁월한 수령의 령도가 보장되지 못한데 있었다.
항일무장투쟁은
항일무장투쟁이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주류로, 가장 높은 형태로서의 지위를 차지하는것은 다음으로 이 투쟁이 조선인민혁명군에 의거하여 일제에게 심대한 군사정치적타격을 주고 다른 반일세력들에 결정적영향을 준데 있다.
식민지민족해방투쟁에서 무장투쟁의 지위문제는 그 담당자인 무장대오의 전투력과 위력에 의하여 규정되게 된다.
항일무장투쟁은 발톱까지 무장한 일제의 100만대군과의 치렬한 군사적대결이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수적으로 일제침략군과 대비조차할수 없었으나 항일전의 전기간 령활무쌍한 군사행동으로 적과의 싸움에서 시종일관 주도권을 틀어쥐고 자기의 전투력과 위력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조선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일제와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수 있다는것을 온 세상에 선포한 보천보전투를 비롯한 무송, 간삼봉, 홍두산, 리명수, 대홍단, 대마록구, 홍기하 등 국내와 만주 도처에서 적의 정예부대들을 죽음의 함정에 몰아넣은 수많은 전투들은 강대한 항일무장력으로서의 조선인민혁명군의 위력을 만천하에 과시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타격력은 식민지민족해방전쟁에서 있어보지 못한 신비스러운것으로서 항일무장투쟁 전기간 일제를 불안과 공포속에 몰아넣었다. 하기에 일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1930년대 초부터 저들을 엄중하게 위협하는 《주적》으로 되고있다고 비명을 질렀으며 이전 쏘련의 국제정치잡지 《태평양》은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활동이 더욱더 완강한 성격을 띠고있다고 하면서 그것은 《지금 벌써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많은 불안을 주고있으며 더욱 커지게 될것이다.》라고 썼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위력은 당시 다른 반일세력들과 국내인민들의 반일투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였다.
보천보전투소식에 접한 려운형은 너무도 격동되여 곧 전투현장에 달려갔으며 현지에서 전적을 보니 망국민의 설음이 순식간에 다 녹아버린것 같고 단군조선이 살아있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절로 흘러내리였다고 하였다. 김구는 보천보전투소식을 실은 신문을 읽고 어찌나 흥분했던지 창문을 열어제끼고 배달민족은 살아있다고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그는 또한 자기 서기에게 운동을 한다던 사람들이 모두 뒤골목으로 자취를 감춘 이 판국에
조국광복회창립이 선포된 직후 남만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의 참모장 윤일파가 지지서한을 보낸것이나 김활석의 휘하에 있던 독립군의 잔존세력이 최윤구를 선두로 조선인민혁명군에 스스로 편입한것은 항일무장투쟁이 당대에 미친 커다란 영향력을 잘 보여주고있다.
보천보전투를 비롯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이 거둔 혁혁한 승리에서 커다란 힘과 용기를 얻은 우리 인민은 조국해방에 대한 신심을 더욱 굳게 가지게 되였으며 이에 따라 각계각층 인민들이 조국해방성전에 한결같이 떨쳐나섰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문헌자료 《고등외사월보》 제46호에 국내 청장년들과 학생들이 《숭배하여 마지않던
항일무장투쟁이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주류로, 가장 높은 형태로서의 지위를 차지하는것은 다음으로 이 투쟁이 일제를 격멸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광범한 인민대중의 열렬한 지지성원과 적극적인 참가밑에 진행된 전민족적항쟁이라는데 있다.
사회력사적운동의 지위는 중요하게 투쟁의 지속성과 광범한 대중의 적극적인 참가여부에 의하여 규제된다.
항일무장투쟁은 다른 무장단체들과는 달리 일시적이거나 중도반단된것이 아니며 또 타국령내에서 남의 무력에 얹혀 자기 존재나 유지한것이 아니라 일제를 격멸할 때까지 15성상의 장구한 기간 끊임없이 활발하게 전개된 가장 위력한 민족해방투쟁이였다.
이에 대하여 도서 《조선》에서는 《반일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의 하나는 일제지배의 전기간 조선에서 끊임없이 존재해온 빨찌산운동이였다.》고 지적되여있으며 《현대사자료》에서는
항일무장투쟁은 전민족을 하나로 결합시켜 일제침략자들을 쳐부시고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이룩하게 한 혁명투쟁이였다.
일찌기 혁명의 길에 나서신 첫시기에 일제를 멸망시킬수 있는 담보는 2천만 민족의 힘이며 전민족의 총동원으로 이루어지는 거족적인 항전이 없이는 식민지노예의 멍에에서 벗어날수 없다는것을 확신하신
거족적인 반일항전으로 일제를 격멸하기 위한
이처럼 항일무장투쟁은 전민족을 일제와의 혈전에로 총동원함으로써 위대한 승리를 이룩할수 있었다.
이에 대하여 일본의 한 출판물은 《조국의 해방을 실현할 전민족적투쟁의 전력은 전쟁시기에 이미 충분히 성숙되여있었던것이다.》라고 썼다.
항일무장투쟁의 위대한 승리의 결과인 조국해방이 조선인민의 주체적력량에 의하여 이룩되였다는것은 다음의 몇가지 자료들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미국사람들은 벌써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한 외교문서에서 《조선공산군(
패전후 쏘련군 제25집단군 사령관 치스쨔꼬브상장을 만난 자리에서 일본군 평양수비대장 다께나또는 조선에 2개의 군단과 9개의 사단 그리고 많은 수의 헌병과 경찰을 가지고있은것은 대쏘전쟁의 준비와 함께 조선의 빨찌산투쟁을 물리치기 위한데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고 실토하였다.
이상의 력사적사실들과 자료들은 조선의 해방이
이와 같이 항일무장투쟁은 탁월한 수령의 전략전술적지도에 있었어나 적에 대한 타격력과 다른 운동에 대한 영향력에 있었어나 그리고 목적실현을 위한 투쟁의 지속성과 대중의 단결성에 있어서 당시까지 있었던 투쟁조류들과는 전혀 다른 폭과 깊이와 높이에서 진행됨으로써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에서 주류로, 가장 높은 형태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차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