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운 품속에서 빛나는 혁명시인의 값높은 삶

 2022.1.4.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혁명전사들을 생사를 같이하는 귀중한 동지로 굳게 믿고 육친의 뜨거운 사랑과 정을 기울여 불굴의 혁명가, 혁명전우로 키우시였으며 그들에게 죽어서도 영생하는 고귀한 삶을 안겨주시였습니다.》

영생불멸의 혁명송가김일성장군의 노래》와 더불어 영생하는 리찬선생.

그는 오랜 인테리출신의 시인이였다. 나라없던 그 세월엔 불우한 식민지청년의 운명을 피할수 없었던 그는 절세위인들의 따사로운 품에 안겨 어엿한 일군으로, 혁명시인으로 자라났으며 생의 뚜렷한 자욱을 남기였다.

오늘도 그의 값높은 삶은 력사에 깊이 새겨주고있다.

위대한 수령님들의 품이야말로 평범한 지식인도 당과 인민이 영원히 기억하는 훌륭한 혁명가로 키워주는 은혜로운 태양의 품이라는것을.


심장의 분출

식민지 조선청년의 울분을 안고 몸부림치던 리찬선생은 해방후 혜산군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하다가 종파분자들의 모해로 해임되여 함흥에 있는 어느 한 신문사에서 기자생활을 하고있었다.

종파분자들은 그를 부위원장직에서 떼버린것만으로는 성차지 않아 일제때 공부한 인테리여서 믿을수 없다고 하면서 의연히 박해를 가하였다.

그러던 주체35(1946)년 4월 어느날 번민속에 모대기던 리찬선생은 뜻밖에도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진행된 연회에 참가하게 되였다.

얼마전 함남도안의 각 정당, 사회단체, 무소속일군협의회를 여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리찬선생처럼 종파분자들의 박해를 받아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량심적인 인테리들과 상공인들을 비롯한 각계각층 대표들에게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고 보람찬 삶의 길을 활짝 열어주시였다.

그날의 연회는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에 감동된 함남도안의 각계층 대표들의 열화같은 흠모에 의하여 마련된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만면에 환한 웃음을 담으시고 좌중을 둘러보시며 지금까지 가지고있던 오해를 말끔히 가시고 민주주의 새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 조국의 무궁한 번영을 위하여 우리 모두 영원히 변함없이 손잡고나가자고 하시며 잔을 높이 들어 참가자들의 행복을 축원해주시였다.

그 순간 30대의 청년시인이였던 리찬선생은 분출하는 심장의 웨침을 더는 참을수 없어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만장의 눈길이 리찬선생에게로 쏠리는 속에 그는 위대한 수령님께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나서 불을 뿜듯 즉흥시를 읊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리찬선생이 읊은 시가 김일성장군 찬가》였다.

랑송이 끝나자 폭풍같은 박수갈채와 함께 김일성장군 만세!》의 환호성이 터져올랐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시여 연회참가자들의 열광적인 환호에 답례를 보내신 다음 리찬선생의 두손을 뜨겁게 잡으시고 우리 함께 건국사업에 손잡고나가자고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하지만 리찬선생은 우리 민족이 그처럼 목마르게 기다리던 영명한 령도자를 이렇게밖에는 칭송하지 못한것으로 하여, 아직도 무엇인가 마음속충동을 터놓지 못한것으로 하여 막 안타까웠다.

바로 그때 김책동지로부터 위대한 수령님을 칭송하여 만민이 부를수 있는 노래를 지어주지 못하겠는가 하는 물음을 받고 그는 만장을 격동시킨 시를 읊고도 마음이 후련하지 못했던 리유가 무엇이였던가를 깨닫게 되였다.

하지만 조선인민들에게 재생의 길을 열어주시고 행복한 미래에로 이끌어주시는 세상에 다시 없을 위인을 칭송하기에는 시인의 붓이 너무도 연약하였다.

밤이 지새는줄도 모르고 가사를 썼다가는 지우고 지웠다가는 다시 쓰기를 그 몇번…

그러던 어느날 항일의 녀성영웅이신 김정숙동지께서 그를 찾아오시여 그의 고충을 헤아리시고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강도 일제를 반대하여 간고한 싸움을 벌려오시던 일들을 들려주시면서 장백산의 험한 줄기들과 압록강의 굽이마다에는 투사들의 피어린 자욱이 찍혀있지 않는곳이 없으며 만주광야와 백두의 천고밀림에는 투사들의 애국의 넋이 어디 가나 고이 깃들어있다고 절절하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참고가 되겠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항일무장투쟁시기에 부르시던 혁명가요들도 알려주시였다.

순간 시인의 눈앞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끄시고 장백산줄기와 압록강굽이를 넘나드시며 일제의 100만대군을 때려부시고 조국으로 진군하시는 장엄한 화폭이 펼쳐졌다.

끓어오르는 격정을 누릴수 없어 붓을 들고 책상에 마주앉은 시인은 혁명송가김일성장군의 노래》의 가사를 단숨에 써내려갔다.

정녕 혁명송가김일성장군의 노래》와 즉흥시김일성장군 찬가》는 수천년 민족사에 처음으로 높이 모신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시인의 다함없는 흠모의 감정의 분출이였으며 위대한 수령님을 대대손손 높이 받들어갈 조선인민의 심장의 분출이였다.


평범한 시인에게 수여된 첫 국가표창

주체35(1946)년 6월하순 어느날 혁명송가김일성장군의 노래》에 대한 시청회가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자신의 노래를 짓지 말라고 엄하게 막으시였기때문에 이날의 시청회는 수령님께 미리 보고를 올리지 못한채 조직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중요한 회의를 지도하시였는데 수령님께서 모임을 마치고 나오시자 창작가들과 예술인들을 가리키며 한 일군이 이 동무들이 노래를 하나 지었다고 하는데 보아주시였으면 하는 청을 올려 뜻깊은 시청회에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게 되였다.

시청회가 끝나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용히 창가로 다가가시여 한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가 동무들이 내 말을 듣지 않고 끝내 노래를 지었군, 그러나 노래보급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겠다고 교시하시였다.

하지만 이튿날부터 김일성장군의 노래》는 막을수 없는 태양의 빛발처럼 천만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끝없는 환희의 파문을 일으키며 온 나라 방방곡곡에 퍼졌다.

그후 시인은 《더욱 굳게 뭉치자 그이의 두리에》, 《흘러라 보통강 력사의 한복판을》을 비롯한 수많은 시들을 창작하여 새 조국건설에 떨쳐나선 인민들을 위대한 수령님의 두리에 묶어세우는데 적으나마 이바지할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시인이 새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높이 평가해주시였으며 거듭거듭 크나큰 믿음을 베풀어주시였다.

정녕 시인 리찬선생에게 베풀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은정은 흐르는 강물처럼 끝이 없었다.

주체36(1947)년 4월 어느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국가표창을 받게 된 모범적인 일군들의 명단을 친히 보아주시다가 그속에 리찬선생의 이름이 있는것을 보시고 여간만 기뻐하시지 않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리찬동무는 인민정권이 주는 첫 표창을 받을만 하다고, 그 동무는 건국사업에 자기의 힘과 지혜를 다 바친 진보적인 인테리이며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작가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좋은 작품을 창작하여 인민들을 애국주의사상으로 교양하는데 기여하였으며 당이 내세운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의 앞장에서 몸바쳐 투쟁한 리찬동무에게 첫 표창을 주자는 제의에 자신께서도 동의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리찬선생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 제정된 국가표창을 받는 영예를 지니게 되였다.

참으로 이것은 해방전 식민지인테리의 설음을 안고 길거리에서 방황하고 죄아닌 죄로 감옥과 류치장에서 죄인취급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평범한 지식인들을 력사의 주인으로, 어엿한 혁명가로 안아키우신 어버이수령님위대한 손길이 낳은 또 하나의 전설같은 인간성장의 이야기였다.


생명의 은인

리찬선생이 표창자의 영예를 지닌지 6개월도 채 되지 않던 어느날 중앙의 한 신문에는 《시인 리찬의 시를 평함》이라는 제목으로 긴 론평이 실렸다.

필자의 이름도 밝히지 않은 이 평론에서는 해방직후에 쓴 리찬선생의 시작품들에서 단편적인 시구들을 끄집어내여 제나름으로 분석평가하면서 마구 공격하였다.

지어는 일부 시들에 표현된 시어들을 과장하면서 현실을 외곡하고 민주제도와 당을 모독한 이것이야말로 《반동》의 목소리와 다른게 무엇인가고 열을 올리였다.

놀라운 이 평론으로 하여 당시 조선의 문단에서는 론의가 분분하였고 적지 않은 작가들이 차츰 평론가의 론조를 수긍하는데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으며 나중에는 일부 사람들이 시인의 미학관을 따지는데까지 이르게 되였다.

후에 판명된데 의하면 이것은 정체를 교묘하게 숨기고 조선의 작가, 예술인대오에 끼여든 우연분자, 불순이색분자들에 의하여 미리 꾸며진 비렬한 모해책동이였다.

그러나 사태의 진상을 알수 없었던 시인은 참기 어려운 고통과 번뇌속에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지 않을수 없었다.

어느날 밤 한 일군이 리찬선생의 집을 찾아왔다.

일군은 맥을 놓고있는 시인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 동무의 문제를 풀어주셨다고 흥분된 어조로 말하였다.

그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리찬선생의 사업과 생활에 대하여 료해하시다가 한 일군의 보고를 통하여 그가 반동작가로 몰리여 압력을 받고있다는 사실을 아시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평론이 실린 신문을 당장 가져오도록 하시고는 그 평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으시였다. 그러시고는 한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가 리찬선생이 지금 어떻게 지내는가고 하시며 리찬동무는 반동작가가 아니라고, 그는 우리와 함께 공산주의까지 변함없이 갈 사람이라고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잠시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리찬동무는 우리 당의 작가이며 애국적인 인테리라고 하시면서 그가 이 시각에도 고민하고있을텐데 이 밤으로 가서 자신께서 한 말을 전하라고 이르시였다.

일군으로부터 위대한 수령님의 믿음어린 말씀을 전달받은 리찬선생은 《아, 장군님》하고 소리쳐부르며 흐르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다.

정녕 위대한 수령님은 얼음판우에 떨어진 씨앗처럼 소생할 길이 없었던 그를 구원하여주신 정치적생명의 은인이시였다.


영원한 삶의 품

인간이 오를수 있는 영광과 행복의 절정은 조국과 인민의 추억속에 애국자로, 충신으로 영생하는것이다.

이런 영예와 행복은 누구나 바란다고 하여 지니게 되는것이 아니며 위대한 수령을 모신 전사들만이 누릴수 있는 최상의 행운이다.

주체63(1974)년 1월 어느날이였다. 리찬선생이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났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비분에 잠겨 한동안 말씀이 없으시다가 부고를 신문에 내야 한다고 이르시면서 재능있는 작가를 아깝게 잃었다고, 리찬동무는 해방직후부터 오늘까지 많은 일을 하였다고, 당을 위해 충실히 일한 동무였다고 높이 평가해주시고 그의 령전에 귀중한 조의품도 보내주시였다.

그때 시인의 장례를 친히 보살펴주신 분은 위대한 장군님이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시인의 부고를 신문에 크게 내도록 친히 조직하여주시고 그 내용까지 다 보아주시였을뿐 아니라 현실체험을 하느라 지방에 내려가있던 시인의 장례를 평양에서 하도록 크나큰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시인의 령구를 실은 자동차가 평양으로 떠날 때 함박눈이 쏟아지는 큰길가에서 사람들은 어버이수령님위대한 장군님의 은정에 목이 메여 흐느끼였다.

이처럼 극진한 보살피심에 의하여 장의식은 평양에서 성대히 거행되고 시인의 령구는 풍치좋은 삼석의 어느 한 언덕에 고이 안장되였는데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것도 부족하시여 얼마후에는 다시 그의 묘를 국가공로자들의 분묘가 안치되여있는 곳에 옮기도록 하시고 화강석묘비에 《혁명시인》이라는 고귀한 칭호를 새겨 다시 세우도록 하시였다.

그리고 리찬선생의 사진과 함께 해방된 조국땅에서 처음으로 읊은 송시김일성장군 찬가》를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시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널리 볼수 있게 하시였으며 리찬선생이 생전에 쓴 시들을 묶어 시집《태양의 노래》를 출판하도록 은정깊은 조치도 취해주시였다.

그뿐이 아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혁명시인이라는 값높은 칭호를 안겨주시고 애국렬사릉에 그의 유해를 안치하도록 하시였으며 그가 위대한 수령님을 처음으로 만나뵈온 함흥땅에 그의 반신상을 세우도록 하시였다.

리찬선생의 삶을 빛내여준 은혜로운 품, 이 땅의 천만사람모두를 혁명가로 키워 영생의 언덕에 세워주는 조선로동당의 품은 이 세상의 열과 정을 다 합쳐도 비길수 없는 위대한 태양의 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