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유적유물들은 우리 선조들이 투쟁과 창조적활동을 통하여 이룩한 귀중한 유산이며 후세에 길이 전해갈 민족의 재부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자기들의 창조적지혜로 후세에 길이 전해갈 민족문화유산들을 많이 창조하였다.
15세기 우리 나라에서는 기상학분야에서도 큰 전진이 이룩되였다. 이 시기에 우리 나라 기상학은 직관과 경험의 단계로부터 점차 과학적인 체계와 내용을 갖추어나가고있었다. 이 과정에 측우기와 같은 비내림량측정기구도 발명되였다.
측우기가 창안되기 이전에는 비물이 땅속에 스며든 깊이를 재는 방법으로 강우량을 측정하였다.
《세종실록》에는 《각 도 감사들이 해당 관청을 통하여 강우량을 보고하는것은 이미 법으로 되여있지만 건조하고 습한 땅의 성질이 같지 않고 땅에 스며든 깊이도 알기 어렵다. 서운관에 대를 만들어 높이가 2자, 직경이 8치되는 쇠그릇을 부어서 대우에 놓고 비를 받으며 그 깊이는 서운관관리가 재여 보고하도록 한다.》라고 기록되여있다. (《세종실록》 권93 23년 8월 임오)
자료에서 보는것처럼 종래에는 비물이 땅속에 스며드는 깊이에 따라 비내림량을 측정하였다. 그러나 비내림량은 토질에 따라 다르고 또 같은 토질에서도 마른 땅인가 습한 땅인가에 따라 달랐으므로 비가 내린 량을 정확히 잴수 없었다.
그리하여 정확한 비내림량을 측정하기 위한 요구로부터 15세기에 측우기와 같은 과학적인 비내림량측정기구를 발명하게 되였다.
이 기록을 통하여 1441년 8월에 창안리용한 측우기는 높이 2자(40㎝), 직경 8치(16㎝)의 쇠로 만든 둥근 통으로서 종래의 강우량측정방법과는 달리 대우에 설치하여 그안에 고인 비물의 높이를 가지고 비내림량을 측정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측우기는 중앙에서는 쇠나 구리로, 지방에서는 사기, 토기로 만들었다.
측우기에 의한 비내림량측정은 사람들의 생활과 농업 등 여러 분야에 이바지하였다.
비내림량에 대한 과학적인 측정방법은 세계적으로 우리 나라에서 제일먼저 도입되였다. 유럽에서 이딸리아의 베네데또 까스뗄리가 측우기를 만들어 비내림량을 측정한것은 1639년이였다. 그리고 측우기를 전국적규모에 설치하고 비내림량을 측정하여 중앙에서 종합적으로 장악하는 제도를 세운것은 그보다도 훨씬 후의 일이였다.
이에 비해볼 때 우리 나라에서의 측우기의 발명은 약 200년이나 앞선것이였다.
이처럼 세계최초의 비내림량측정기구-측우기의 발명은 우리 인민의 뛰여난 지혜와 재능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나라 중세 기상관측의 발전수준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