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우리 민족이 낳은 재능있는 문인이며 실학자인 추사 김정희

 2019.3.13.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지난 시대의 작가와 작품을 문학사나 예술사에서 취급하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작가, 예술인들과 자라나는 새 세대들에게 우리 문학사와 예술사에도 당대 문학예술발전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 작가와 작품이 있었다는것을 알려줌으로써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는 동시에 지난날의 력사에서 경험과 교훈을 찾게 하자는데 있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16권 171페지)

우리 민족이 낳은 재능있는 문인들가운데는 18세기말- 19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추사 김정희도 있다.

김정희(1786-1856)는 봉건사회말기 우리 나라 실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선행한 실학사상을 토대로 하여 자기의 새로운 실학적견해를 확립하고 학문연구와 문학창작활동을 벌린 재능있는 학자이며 문인이다.

김정희는 서예와 그림에 조예가 깊었을뿐아니라 시문학에서도 당시 문단에서 무시할수 없는 지위를 차지하고있은것으로 하여 사람들은 그를 《시서화 3절》이라고 불렀다.

김정희는 1786년 경상북도 경주에서 리조판서의 벼슬까지 하였던 유당 김로경과 어머니 유씨의 아들로 태여났다. 자를 원춘, 호를 완당 또는 추사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시당, 시암, 례완, 로당, 로과 등의 호를 가지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붓글씨에 아주 뛰여난 솜씨를 가지고있어 부모들과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당시 좌의정이였던 채제공이 7살난 김정희가 립춘날에 쓴 립춘방을 보고 소년명필이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학식있는 아버지 김로경에게서 글씨와 시문을 익힌 그는 14살이 되던 해에 유명한 실학자인 박제가의 제자가 되여 고증학과 시, 글씨를 배웠다. 박제가의 학문적영향은 그가 후기실학자로서 《시서화 3절》로 이름을 날릴수 있게 한 주요한 요인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는 180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814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충청도 암행어사,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그는 22살에 아버지를 따라 처음으로 청나라에 가서 당시 그 나라의 이름난 학자였던 옹방강, 완원 등을 알게 되였으며 거기서 시와 서예 등 여러 분야의 학문 특히 고고학분야에서 뛰여난 실력을 발휘하여 청나라학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의 뛰여난 식견에 큰 충격을 받은 70대의 청나라학자였던 완원이 방금 초고를 끝낸 경서해설도서를 청나라학자도 아닌 조선의 젊은 청년 김정희에게 남먼저 보이고 그의 평가를 받았다는 일화도 이 시기에 생긴것이였다.

청나라에서 그곳 문인들과의 교류는 김정희의 안목을 넓혀주는데서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그는 청나라에서 돌아온 후 당시 실학의 대표자들이라고 할수 있는 다산 정약용과 자하 신위와의 학문적련계속에 실학에 대한 그들의 선진적인 견해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자기의 실사구시적인 립장을 확립하였다.

그는 일생동안 학문을 연구하면서 수많은 공적을 이룩하였다.

그의 제자인 민규호는 김정희의 전기를 쓰면서 그의 박식과 실학적인 경향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공(김정희를 말함)은 … 십삼경을 전심으로 공부하고 특히 주역에 깊었으며 금석, 도서, 시문을 깊이 체득하지 않은것이 없었으며 더우기 그의 서법은 온 천하에 알려졌다.》

김정희는 우선 자기의 미학적견해에 기초하여 많은 시들을 창작함으로써 실학파문학의 근대적요소를 강화하고 사실주의문학을 발전시키는데서 매우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가 창작한 시작품들은 568수가 되는데 이 시들은 김정희의 문집인 《완당선생전집》 9권과 10권에 실려있다.

김정희는 자기의 저서에서 《대체로 우리 나라의 임진란이후에 나라의 풍속과 운수가 어떠하다는것은 알지 못한다. 조정의 법전으로부터 항간의 풍속에 이르기까지 크게 변하지 않은것이 없으며 지금에 와서도 문장과 서화의 작은 도리가 회복되지 않고있다. … 명종이후에는 흐르는 물과 같이 맑은 시풍은 얻어볼수가 없다.》라고 하면서 모방주의적이며 형식주의적인 창작경향을 반대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르는 새로운 풍격의 작품을 창작할데 대한 견해를 제기하였다.

이와 함께 《신(神), 리(理), 기(氣), 미(味)는 문장의 정화를 이루는것이고 격(格), 률(律), 성(聲), 색(色)은 문장의 형식을 이루는것이다. 형식을 버린다면 정화로운것도 어지럽게 되는것이다. 옛 시절에 배우는 사람들이 반드시 그 형식속에서 시작하여 정화로움을 만나고 그 정화로움을 모으고나서 형식을 얻게 되였다. 지금에 와서 그 형식을 얻지 않고 어찌 정화로움을 얻으며 또 정화로움을 버리고 어찌 형식을 보게 되겠는가!》라고 하면서 글에서의 내용과 형식의 조화로운 통일을 실현해야 한다는 진보적인 미학견해를 제기하고 이에 기초하여 시창작을 진행하였다.

그가 창작한 시들에는 자기의 실사구시적인 탐구정신을 반영한 《자오천》, 《하양 군수로 부임하는 리두신을 바래우며》, 《징해루》, 《돌살촉의 노래》, 《희롱조로 조공례에게》와 같은 작품들과 인재가 박해를 당하는 어지러운 사회풍조와 생활풍조를 비판하고 량반관리들의 부패무능과 공리공담을 비판한 《귀양가는 이재를 보내며》, 《초의에게》, 《우신사 경언과 함께》, 《파리》, 《초의를 대신하여 회답을 보내며》, 《황암에서 폭포를 보며》와 같은 작품들이 있으며 반침략투쟁에서 위훈을 세운 애국적인물들과 우리 나라의 이름난 문인들을 형상한 작품들도 있다.

또한 우리 인민의 아름다운 미풍량속과 세태생활을 반영한 《안시성》, 《김천리가 그린 부채그림에 붓을 달리노라》, 《정월대보름밤에》, 《씨름》, 《7석》와 같은 작품들도 있다.

특히 그는 특색있는 시적소재를 탐구리용하고 다양한 한자시형식을 활용하였을뿐아니라 시형상을 구체적이고 생동하게 한것으로 하여 그의 시는 한폭의 그림을 보는것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추사 김정희의 시문학은 우리 나라 실학파시문학의 발전면모를 보여주고 우리 나라 중세문학의 근대문학에로의 점차적이행과정을 촉진시키는데서 특색있는 기여를 한것으로 하여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김정희는 또한 서예에 대한 리론적연구가 깊었고 서예가로서의 뛰여난 재능을 가지고있었다.

김정희는 서예를 한갖 글씨를 쓰는 기교로서가 아니라 내용과 형식이 갖추어진 가지는 예술분야로 리해하면서 글씨는 글씨를 위한 글씨가 아니라 반드시 정확한 지식과 옳바른 정신으로 뜻있는 내용을 담는 글씨로 써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서예에서 봉건지배층들의 기계적이며 형식주의적인 기교방법을 개탄하면서 다른 나라의 《법서》라고 하면 참과 거짓, 착오를 검토함이 없이 그 이름에 팔리워 무조건 맹종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하였다.

웅건한 박력과 자유분방한 필치, 기발한 구성으로 예술적풍격을 자랑하는 그의 독특한 필체는 《추사체》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다. 그가 《추사체》를 창조하는 과정에 10개의 벼루와 1 000자루의 붓촉을 닳아없앴다고 한다.

그의 서예작품들중에는 《자손을 가르치려면 마땅히 뉘우침없는 떳떳한 도리로 가르치라》를 비롯한 여러 작품들이 있는데 국내외의 여러 박물관들에 적지 않게 보관되여있다.

김정희는 또한 화가로서도 이름이 있었다.

풍경화와 란초와 참대를 즐겨 그리군 하였는데 《산수도》, 《호수가의 정자》, 《묵란도》, 《묵죽도》 등 적지 않은 미술작품들이 남아있다.

학자로서 김정희가 이룩한 공적들중의 하나는 우리 나라의 금석학과 고고학을 새로운 경지에 올려세운것이다.

김정희는 당시 금석문들을 탑본수집하여 서체를 감상하거나 서예의 기법을 연구하는 일면에 치우치던 결점을 시정하고 력사연구에로의 폭넓은 방향전환을 시도하였다.

평양성돌과 황초령비에 대한 새로운 력사적고증은 우리 나라 금석학계에서 새로운 발견이였다.

그는 북청에서 류배살이를 하는 속에서도 청해토성자리에서 발굴된 물건이 원시시대사람들이 쓰던 돌도끼, 돌활촉이라는것을 고증하였으며 경주에서 조산(인공적으로 만든 산)으로 전해오던것들이 다 신라왕이나 귀족들의 무덤이라는것을 고증하고 《신라진흥왕릉고》를 저술하였다.

김정희는 이밖에 천문, 력학, 지리, 음악에 대한 연구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김정희가 여러 부문 학문연구에서 이룩한 많은 성과들은 그의 뛰여난 재능과 노력만이 아니라 나라의 발전을 지향하는 김정희의 진보적인 실학사상과 열렬한 민족애에 바탕을 두고있다고 볼수 있다.

그의 문집으로는 《완당집》(10권)이 있고 저서로는 《례당금석과안록》, 《해동금석목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