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발해 및 후기신라시기 조선동해의 활발한 리용

 2021.3.23.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사실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늘 바다를 사랑하며 개척하여왔습니다.》 (김일성전집》 제24권 105~106페지)

발해, 후기신라시기 우리 인민들은 조선동해를 신성한 우리 민족의 령해로 여기면서 바다자원을 적극 채취하였고 일본렬도로 진출하는 항로로 활발히 리용하였으며 나라를 수호하는 호국신으로 숭상하였다.

698년 성립된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으로서 그 령토와 주민들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발해인민들은 조선동해를 크게 차지한 유리한 자연지리적조건을 리용하여 드넓은 동해바가에서 바다물고기와 바다짐승을 많이 잡아먹거나 바다나물을 채취하면서 바다수산업을 발전시키였다. 그들이 이 시기 리용한 바다물고기와 바다나물, 바다짐승들은 대표적으로 숭어, 대게, 다시마, 바다표범(넝에) 등이다.

물고기인 숭어(치어)는 우리 나라 풍습에 수어라고 불렀는데 《림원16지》에 의하면 《그 이름은 형태가 길고 잘 생겼기때문에 생긴것이다.… 몸은 둥글고 머리는 평평하며 뼈는 연하지만 살은 질기다.》라고 소개하였다. 이 물고기는 발해인민들이 조선동해에서 많이 잡고 식용으로 리용하였다고 한다.

《책부원귀》에 729년에 발해에서 당나라에 치어까지 보냈다는것으로 보아 발해인민들이 일상적으로 숭어를 많이 잡고 식용에 리용하였다고 볼수 있다.

바다게인 대게(방해)는 《송막기문》에 《발해의 방해는 붉은색인데 크기는 쟁반만 하고 엄지발은 크고 두터우며 그 다리는 중국게의 엄지발같다.》고 하였다. 대게는 신포 마양도이북의 동해앞바다 깊이 200~250m어간에 사철 살고있었다는데 《송막기문》에 이 게를 소개하고있는것은 발해인민들이 많이 잡고 수출하여 주변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져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바다나물인 다시마는 정약용이 집필한 《경세유표》에 천하의 귀물인데 발해때 함흥연해(동해)에서 생산된것이라고 하였다.

《신당서》 발해전에도 발해의 다시마가 민간에서 귀한것이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이 바다나물이 발해의 이름난 동해특산물로서 당나라에까지 크게 알려져있었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바다표범(물범-넝에)은 발해에서 당나라에 바다범가죽을 수출한 기록으로 보아 조선동해에서 많이 잡아 리용하였다고 볼수 있다.

이러한 단편적인 자료들은 발해인민들이 조선동해를 활발히 리용하여왔다는것을 잘 보여준다.

발해사람들은 조선동해자원을 널리 리용하였을뿐아니라 그에 토대하여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과의 서신왕래와 경제문화교류를 적극적으로 진행하는 과정에 일본으로 가는 조선동해의 바다길을 새롭게 개척하고 리용하기 위한 활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속일본기》(권10 성무)는 발해가 727년 2월 첫 사신을 일본에 파견하여 왕에게 보낸 국서에서 《발해는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고 부여이래의 오랜 전통을 계승하고있다.》고 강조하면서 고구려멸망후 두절되였던 관계를 회복하자고 한데 대하여 전하고있다.

《일본삼대실록》(권3 청하)은 859년 1월 발해사신 오효신이 《선명력》이라는 천문력서를 보급한데 대하여 전하고있으며 이 력서는 그후 1684년까지 일본에서 쓰이였다.

《일본삼대실록》(권3 청하 정관1년)에는 872년 발해사신일행이 배 2척에 105명정도의 인원을 태우고 수많은 무역품들을 싣고있었으며 국가무역을 한 다음에도 수도의 귀족관료들, 장사군들과 40만문(당시 일본화페)의 무역거래를 한데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발해에서 당시 큰 배들을 무어 동해배길을 따라 일본과의 무역을 크게 진행하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일본에로의 사신왕래, 문화적교류를 통해 발해사람들이 새로운 항해술과 발전된 배무이기술에 기초하여 조선동해를 개척, 리용하는데서 큰 전진을 가져왔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일본의 책들인 《속일본기》, 《일본삼대실록》, 《연회식》, 《일본후기》, 《속일본후기》 등에는 발해사신들이 발해가 존재한 200여년간에 무려 34차례나 일본을 방문하고 경제문화교류를 한데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발해사람들이 조선동해를 활발히 리용한 사실을 잘 알수 있다.

발해사람들은 일본으로 래왕하는 바다길은 매우 위험하였으나 삼국시기 사람들처럼 강원도와 경상도앞바다가 아니라 함경도앞바다에서 조선동해바다길을 새롭게 개척하는 적극적이며 진취적인 활동을 벌렸다.

이 시기 일본으로 가는 발해의 사신단과 개별적사신들의 조선동해바다개척길을 보면 남경남해부(현재 함경남도 북청부근)나 동경룡원부(현재 함경북도 청진부근)항구의 동해앞바다를 떠나 주로 우리 나라 해류(한류)를 타고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다가 동쪽방향으로 횡단하여 가던가 또는 강원도앞바다까지 내려오다가 동조선해류(난류)를 만나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울릉도-독도항로길을 따라 일본서부지역해안을 거쳐 동북방향으로 흐르는 해류를 따라 노또반도를 비롯한 가가(이시가와현), 에찌젠(후꾸이현) 등지에 도달하였다. 발해사신단이 발해로 돌아올 때에는 계절풍을 리용하여 조선동해의 동북부를 에돌면서 연해변강해안을 따라 두만강하구부근에 와닿았다.

이와 같이 발해사람들은 일본에로의 사신왕래와 문화적영향을 통해 조선동해길을 새롭게 개척하면서도 활발히 리용하였다.

신라에서도 조선동해를 리용하기 위한 활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신라사람들은 조선동해의 한가운데에 있는 우산국이 512년부터 신라의 속국으로 된 조건에서 우산국을 중심으로 한 조선동해길을 리용하기 위한 활동을 보다 적극화되였다.

특히 조선동해에 대한 자세한 관찰과 기록사업이 전기신라에 이어 계속되였다.

699년 7월에 동해의 물이 피색으로 변하였다가 닷새만에 회복되고 9월에 동해의 물이 서로 부딪쳐서 그 소리가 수도에까지 들릴 정도였으며 병기고에 있는 북과 나팔소리가 스스로 울리는 일도 일어났다는 기록과 915년 6월 참포(경상도 영일군)의 물과 동해의 물이 서로 부딪쳐 물결의 높이가 20길(장)가량 솟았는데 3일이 지나서야 잔잔하였다는 기록이 그 대표적인것이였다.

이러한 관찰과 기록들은 신라사람들이 조선동해를 자기 령토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국가적인 관심속에 관찰과 기록을 진행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신라의 문무왕이 평시에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짐은 죽은 후에 호국대룡이 되여 바다를 수호하고싶다.》고 하였고 그가 죽자 신하들이 그의 유언에 따라 그를 조선동해입구의 큰 바위밑에 안장하였고 이를 대왕암이라고 불렀다는 력사기록은 신라사람들에게 있어서 조선동해가 호국신으로, 신성한 민족의 바다로 되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그후 신라사람들은 문무왕이 《호국대룡》이 되였다는것을 기정사실화하면서 683년에는 동해바다에 떠다니는 작은 섬이 있어 그 섬의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가물때에는 비가 오며 장마때에는 비가 그치고 파도가 잔잔해지기때문에 그것을 《만파식적》(거친 물결을 잔잔하게 하는 피리)이라고 부르며 국보로 삼고 경주의 《천존고》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자료들은 후기신라사람들도 조선동해를 구체적으로 조사장악하고 나라를 수호하는 호국신으로 숭상하면서 다양하게 리용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발해와 후기신라시기에 우리 인민들은 조선동해를 다양하게 활발히 리용하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