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족은 예로부터 애국심이 강하고 자주정신이 높은 민족으로서 외래침략자들을 쳐물리치고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꿋꿋이 지켜왔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전통이다.
그러나 부패무능한 조선봉건왕조통치배들이 오랜 세월 부국강병대책을 세울대신 태평성대만 부르짖은탓으로 하여 국력은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지게 되였다. 그리하여 20세기초에 조선봉건국가는 마침내 일제침략자들에게 국권을 빼앗기는 민족사적비극을 빚어내게 되였다.
일제에 의한 국권의 상실을 계기로 조선인민은 치솟는 격분을 참을길 없어 나라의 자주권을 되찾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섰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반일의병투쟁에 나섰으며 이에 고무된 애국적지식인들은 국권회복운동의 한고리로 애국문화운동을 힘차게 벌리였다.
《망국후 10년동안에 국내에서는 일제의 폭정하에서 비밀결사와 애국문화운동 등으로, 국외에서는 혁명단체들의 조직 또는 반일투쟁으로 민족해방운동은 끊임없이 전개되였습니다.》 (
애국문화운동은 일제의 조선강점을 전후한 시기 애국적지식인들이 벌린 문화계몽운동이였다.
이 운동은 19세기 70~80년대에 발단하여 1919년의 3. 1인민봉기에 이르기까지 근 반세기에 걸쳐 진행되였다.
애국문화운동의 주도세력은 당시 근대적사상으로 계몽각성된 신채호(1880-1936), 박은식(1860-1926), 리준(1859-1907), 남궁억(1863-1940), 주시경(1876-1914) 등 애국적인 지식인들이였으며 그 지도리념은 부르죠아민족주의였다.
애국적인 지식인들은 인민들의 반일투쟁에 고무되여 국권회복을 위한 대중계몽운동에 떨쳐나섰다. 그들은 언론활동과 민족교육운동, 국학운동, 문예활동을 비롯한 여러가지 형식과 방법으로 인민들속에 반일애국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근대적지식을 배양하는것을 자기들의 활동의 기본목적으로 하였다.
애국문화운동은 크게 세개의 력사적단계를 거쳐서 조직전개되였는데 첫째 단계는 19세기 70~80년대로부터 1905년 《을사5조약》의 날조에 이르는 력사적시기를 포괄하고있다. 이 단계는 애국문화운동이 발단되고 그것이 하나의 독자적인 사회적운동으로 전변되여 점차적으로 앙양의 길에 들어선 시기로 특징지어지며 나라의 근대적발전을 위한 대중계몽운동이 주되는 측면을 이루고 이에 나라의 독립을 굳건히 고수하기 위한 계몽활동이 일정하게 배합되였다.
둘째 단계는 《을사5조약》이 날조된 이후부터 1910년 일제의 국토병탄에 이르는 력사적시기를 포괄하고있다. 이 단계는 애국문화운동이 급속히 확대발전하던 시기, 애국문화운동의 전성기로 특징지어지며 일제에게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반일애국사상고취를 위한 계몽활동이 운동의 기본을 이루고 이에 근대적지식의 계발을 위한 계몽활동이 얼마간 배합되였다.
셋째 단계는 1910년대부터 1919년 3.1인민봉기까지의 력사적시기를 포괄하고있다. 이 단계는 총체적으로는 운동의 점차적쇠퇴와 종말의 시기로 특징지어지며 나라의 독립을 위한 애국독립사상계몽을 운동의 기본내용으로 삼았다.
애국문화운동시기 애국적지식인들은 우선 출판언론활동을 힘있게 벌렸다.
19세기말‐20세기초 우리 나라에서의 첫 근대적신문인 《한성순보》를 발간한데 이어 《한성주보》, 《독립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많은 신문들과 《대조선독립협회회보》,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교육월보》, 《가정잡지》, 《소년한반도》 등 수많은 잡지들을 발간하였다. 또한 《서유견문》, 《학규신론》 등 많은 애국계몽적도서들도 출판하였다.
신문과 잡지, 도서들은 일제의 침략책동과 친일주구들의 매국적죄행을 신랄히 규탄하고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할데 대한 글들을 실어 대중을 반일애국사상으로 계몽각성시키고 그들을 국권회복과 나라의 근대화를 위한 투쟁에로 고무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애국문화운동가들은 이 시기에 일제의 조선강점정책으로 말미암아 국권이 상실되고 우리 민족이 식민지노예로 전락된 엄중한 정세하에서 지난날 나라의 독립과 민족적존엄을 고수하는 투쟁에서 이름을 떨친 애국명장들의 투쟁업적을 서술한 전기작품들을 창작하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였다. 애국문화운동가들은 이 시기에 《을지문덕전》, 《강감찬전》, 《최도통전》, 《양만춘전》, 《리충무공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기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애국문화운동시기 애국적지식인들은 또한 정치계몽운동단체들을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1896년에 독립협회가 조직되였으며 1904년에는 공진회가, 1905년에는 헌정연구회가 조직되였다. 련이어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 등 많은 정치계몽운동단체들이 조직되였다. 이 단체들은 인민들속에 근대적인 의식과 지식을 체득시키기 위한 계몽활동과 함께 반일애국정신을 심어주기 위한 활동을 적극 벌리였다. 애국적지식인들은 민족교육의 진흥을 국권회복과 나라의 근대적부강발전을 위한 근본조건의 하나로 인정하고 반일민족교육운동도 힘있게 벌리였다.
애국적지식인들은 서우학회, 한북흥학회, 서북학회 등 많은 학회들을 조직하여 그것들이 민족교육운동을 주도하게 하였다. 그리고 전국적범위에서 사립학교설립운동을 강화하였으며 사립학교교육을 반일민족교육운동의 주되는 형태로 선정하였다.
사립학교들에서는 청소년학생들에 대한 반일애국사상교육, 상무교육을 기본으로 하는것과 함께 근대적인 지식을 주기 위한 교육에도 일정한 관심이 돌려졌다.
사립학교설립운동이 절정을 이룬 1907~1908년에 사립학교의 수는 전국적으로 4 000~5 000개에 달하였다. 그가운데서 평양의 대성학교, 안주의 안흥학교, 정주의 오산학교, 강화의 보창학교 등은 이름있는 학교들이였다. 전국의 사립학교들은 애국인재를 키우며 반일사상을 배양하는 터전으로 되였다.
이 시기 애국적지식인들은 우리 나라의 말과 글, 력사를 고수하며 인민들속에 강렬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국학운동을 적극 벌리였다.
주시경, 리봉운 등 이름있는 국어학자들은 《국어문법》, 《국어문전음학》 등 여러 가치있는 도서들을 집필출판하여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사회적인식을 높이고 그것을 고수하도록 사람들을 불러일으키는데 적지 않게 이바지하였다.
애국문화운동은 일정한 력사적의의를 가지였다. 이 운동은 당시 우리 인민의 민족적자각을 높여주고 민족적단합을 이룩하는데서 일정한 계기를 열어놓았으며 사람들속에서 반일애국정신을 적극 불러일으킴으로써 그후의 반일민족운동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또한 애국문화운동은 다른 반일운동들에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으며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책동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를 고수하고 그것을 근대적으로 발전시키는데도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