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문화통치시기 중추원개편의 기만성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장경일 ,   2020.11.20.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제는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앞으로 그 어떤 민주주의적정치를 실시할듯이 떠들어대였으나 그것은 허울뿐이였습니다.》 (김정일전집》 제6권 328페지)

지난날 일제침략자들이 강도적인 방법으로 《을사5조약》을 날조하고 조선을 식민지로 강점하였던 때로부터 115년이 되였다. 《을사5조약》날조후 40여년동안이나 조선을 식민지로 강점한 일제는 력사에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가장 악독하고 교활한 방법들을 다 써가면서 조선인민에게 온갖 불행과 고통을 들씌웠다.

3.1인민봉기후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들고나왔던 중추원의 개편확장도 본질에 있어서는 식민지통치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교활한 술책에 지나지 않는것이였다.

문화통치의 간판밑에 일제가 벌린 조선총독부 중추원개편의 기만성은 우선 허울뿐인 중추원의 사명과 친일매국노들로 이루어진 구성에서 뚜렷이 나타나고있다.

일제는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조선총독부안에 있는 중추원을 확장하고 거기에 일부 친일관료들을 끌어들여 조선인민의 참정권을 보장하는듯이 가장해나섰다.

3.1인민봉기가 일어난 초기에 조선에서의 《참정권》실시를 떠들다가 인차 그것을 거부해나선 일제는 식민지의회를 세우거나 종주국의회에 식민지나라 의원들을 대표로 참가시키는 다른 제국주의나라들에서의 통치방법을 본따서 총독부의 소속기구인 중추원을 개편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원래 중추원은 조선봉건정부의 통치기구체계에서 중요한 의정기구로 존재하고있었다. 《한일합병조약》을 날조한 후 일제는 조선봉건정부의 일체 관료기구들을 배제하고 해산하면서도 중추원만은 명칭상으로나마 그대로 유지존속시켰으며 그것을 식민지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의 소속기구로 만들었다.

일제는 조선사람들이 중추원을 통하여 시정에 대한 의견을 제기할수 있다고 떠벌이면서 마치도 조선인민의 의사를 참작하여 총독통치를 실시할듯이 떠들었다.

그러나 중추원은 그 어떤 정사를 보거나 그에 대한 의견을 제기하는 기관이 아니라 조선에서 일제가 실시하는 식민지정책수립과 집행에서의 편의를 도모해주는 노복에 불과하였다.

일제는 중추원을 조작하면서 그 《관제》에서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조선총독에게 속하며 조선총독의 자문에 응한다. 조선총독은 중추원을 통하여 조선에서의 구관 및 제도에 관한 사항을 조사할수 있다.》고 그의 어용자문적성격을 명백히 밝히였다.

조작초기 중추원에는 의장(총독부 정무총감), 부의장 1명, 고문 15명, 참의 20명, 부참의 35명이 배속되여있었다.

일제는 바로 이러한 어용자문기관에 불과한 중추원을 개편하면서 그것이 마치도 조선사람들에 대한 《참정권》실시로 되는듯이 떠들어댔다.

1921년 개정에 따라 조선인 친일주구들로 임명되였던 부참의는 모두 참의로 개칭되였고 종전에 15명이였던 고문은 5명으로 줄어들었으며 참의는 55명에서 65명으로 늘어났다. 65명의 참의중에서 41명은 중앙에서 선발되며 나머지 24명은 각 도지사들이 추천하는 인원으로 구성되였다.

65명의 참의는 100정보이상의 토지를 가진 지방대지주들과 예속자본가들이였다.

의장을 제외한 중추원의 전체 관리는 철저히 조선인 친일매국노들이였다. 여기에는 일제의 조선강점과 강제합병에 발벗고나섰던 리완용, 송병준, 박제순, 리지용과 같은 특등매국노들과 식민지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해나선 친일적인 구시대관리, 지주, 자본가, 일본에 망명하였거나 일본류학경력을 가진자들이 들어갔다.

일제는 이러한 몇명 안되는 조선인 친일주구들을 총독부의 중추원에 더 끌어들이고는 마치도 조선인민의 의사와 요구를 존중하는듯이 떠들어대면서 문화통치의 본질을 가리우려고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일제가 중추원에 끌어들인 일부 친일주구들의 관직을 부참의에서 참의로 올려주고 년봉급도 1 200원으로부터 3 000원으로 높인것도 본질에 있어서 《참정권》실시를 선전할수 있는 그 어떤 변화를 보여주자는데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제는 조선에 대한 간악한 식민지통치의 침략적본질을 문화통치라는 비단보자기로 감싸려고 하였던것이다.

문화통치의 간판밑에 일제가 벌린 조선총독부 중추원개편의 기만성은 또한 조선총독에게 철저히 복종하여 진행된 그 운영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이미 일제는 《한일합병조약》을 날조한 후 1910년 9월 《조선총독부 중추원관제》라는것을 공포하고 조선총독부안에 중추원을 두였지만 1919년 조선인민의 거족적인 3.1인민봉기가 일어나기 이전까지는 한번의 회의도 소집하지 않았다.

그후 일제는 조선인민의 반일의식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문화정치》의 기만적인 구호를 내들고 《참정권》실시를 떠들면서 중추원회의를 벌려놓았다. 그러나 중추원은 그 기능상 조선사람들의 옛 관습이나 제도같은 문제들에 대한 조선총독의 자문에 해답을 주는 식민지통치의 보조기관에 지나지 않는것이였다.

그리하여 중추원은 조선인민의 의사와 요구와는 무관계하게 소집되고 진행되였으며 문화통치시기부터 패망할 때까지 26차의 회의와 9차의 상담회만을 조직하였다.

회의나 상담회를 진행하는 경우에도 고문이나 참의를 비롯한 조선인관리들은 의장의 승인밑에서만 발언을 할수 있었으며 같은 사항에 대해서는 한번이상 발언할수 없었다. 의제는 총독이나 의장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한정되며 그것마저도 의장이 의사종결을 선포한 후에는 누구도 발언할수 없게 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일제는 저들이 신임하는 친일주구들의 입에까지 자갈을 물려놓았다.

중추원운영의 이와 같은 형편에 대하여 일제침략자들자체가 《중추원은 조선총독에 대한 단순한 자문기관이였으며 … 전면적으로 유명무실한 기관이였다.》고 고백하였다.

이처럼 일제는 문화통치의 기만적인 간판을 내걸고 중추원을 개편확장하고 운영하는것을 통하여 조선사람들에게 그 무슨 《참정권》을 부여하고 복지시대라도 온것처럼 떠들었지만 그것은 조선인민의 반일의식과 민족적각성을 마비시키고 저들의 식민지통치에 복종시키기 위한 교활한 술책에 불과하였다.

력사적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본반동들은 오늘까지도 과거 일제가 조선침략죄행을 미화분식하면서 조선인민앞에 저지른 범죄적죄행에 대하여 성근하게 사죄하고 반성하지 않고있다.

우리 인민은 일제침략자들이 저지른 죄악에 찬 침략력사를 한시도 잊지 않고있으며 피의 대가를 천백배로 받아내고 쌓이고쌓인 민족의 원한을 기어이 풀고야말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