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시조왕릉ㅡ동명왕릉을 발굴하고 정리하는 사업을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의 교원, 학생들에게 맡겨주시여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박사 부교수 김영식
 2023.1.4.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동명왕릉은 고구려시조왕의 무덤으로서 우리 나라 력사와 문화전통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력사유적입니다.》 (김일성전집》 제88권 79페지)

동명왕릉은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에 자리잡고있는 고구려시조왕의 무덤이다.

동명왕릉이 고구려시조왕의 무덤으로서 조선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될수 있은것은 일찌기 이 무덤을 발굴하고 무덤주인공문제를 과학적으로 해명하도록 이끌어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현명한 령도를 떠나서 생각할수 없다.

지금은 이 무덤이 고구려시조왕의 무덤으로 과학적으로 밝혀졌지만 지난 시기는 물론 1970년대초까지만 하여도 동명왕릉의 주인공문제는 옳바른 해명을 보지 못하고있었다.

《삼국사기》,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조선중세력사책들에는 고구려의 시조왕릉이라고 전해오는 무덤이 평양부근의 중화땅(오늘의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에 있으며 이곳에서 동명왕을 숭배하는 제사의식을 진행하였다고 기록되여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여 평양부근에 고구려시조왕의 무덤인 동명왕릉이 있게 되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밝히지 못하고있었다.

일부 사가들은 동명왕은 전설에서나 나오는 신화적인 인물이며 평양부근에 있는 무덤도 실지 고구려시조왕의 무덤 즉 동명왕릉이 아니고 다만 동명왕릉이라고 전해져오는 무덤이라고 하였다.

지난날 평양시 력포구역 무진리(오늘의 룡산리)에 있는 릉이 동명왕의 무덤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학자들속에서도 여러가지 의견이 제기되고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동명왕이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오늘의 료녕성 환인)지방에서 활동하다가 그곳에서 죽었으므로 그의 무덤은 응당 졸본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사람들이 수도를 중국의 집안에서 평양으로 옮길 때 시조왕의 무덤을 옮겨오지 않았다느니, 동명왕의 무덤이 집안에 있다느니 하면서 무진리(오늘의 력포구역 룡산리)에 있는 무덤을 동명왕의 릉이 아니라고 하였고 평양부근에 동명왕릉이 있다는 사실자체를 부인하려고 하였다.

1940년대 후반기와 1950년대에 여러 학자들이 이 무덤에 대한 두차례의 발굴을 진행하였지만 무덤칸안에서 벽화를 찾지 못하였고 왕의 무덤으로 볼수 있는 유물도 발견하지 못하였기때문에 무덤주인공에 대하여 더 론의하지 못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일찌기 력포구역 룡산리에 있는 무덤을 여러 차례 찾아주시고 이 유적에 대한 자료들을 깊이 연구하신 후 주체63(1974)년 1월 23일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연구집단에 주체적립장에서 동명왕릉문제를 대할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면서 왕릉발굴사업을 전면적으로 폭넓게 진행하도록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의 교원, 학생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받들고 력포구역 룡산리에 있는 무덤과 그 일대의 고구려유적들에 대한 발굴사업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섰다.

력사학부의 교원, 학생들은 먼저 무덤에 대한 구체적인 발굴사업을 진행하여 무덤의 내부 및 외부구조를 과학적으로 밝혔다. 그리고 무덤칸 내부벽면에서 련꽃무늬가 그려진 장식무늬벽화를 새로 찾아냈으며 순금제보요와 구슬, 각종 꽃무늬장식품들, 금관못, 은관못 등 각종 유물들을 발견하였다.

이와 함께 무덤주변의 고구려무덤들 19기와 1개의 못을 조사발굴하였다. 무덤주변의 고구려무덤들가운데는 벽화가 그려진 무덤들이 2기나 있었으며 이 무덤들이 동명왕릉을 중심으로 배치된 달린무덤(배총)들이라는것이 확인되였다.

동명왕릉에 대한 발굴과정에 무덤의 남쪽 150m정도 떨어진 곳에서 부지면적이 약 3만m2에 달하는 대규모의 건축터를 발굴정리하였다. 력사학부의 교원, 학생들은 건축터에서 알려진 기와, 질그릇 등 유물들과 거기에 새겨진 글자들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이 유적이 바로 고구려불교사원인 정릉사의 터라는것을 확증하였다.

동명왕릉과 정릉사터에 대한 조사발굴사업을 통하여 고구려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때 고구려시조왕의 릉을 현재의 위치에 옮겨왔다고 보는것이 정확하다는것을 과학적으로 밝힐수 있었으며 고구려의 력사를 연구하는데서 가치있는 자료들을 많이 찾아내게 되였다.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의 교원, 학생들은 조사발굴자료들을 종합하여 우선 이 무덤이 외부 및 내부구조로 볼 때 고구려시기의 무덤이라는것, 무덤내부에서 왕관에 달았던 꽃모양의 장식품쪼각, 보요 등의 유물이 나오므로 왕의 무덤이라는것을 론증할수 있었다.

또한 무덤앞에 웅장하게 서있었을 정릉사의 터와 무덤뒤에 옹위하듯 배치된 19기의 달린무덤들, 무덤내부벽면에 그려진 련꽃무늬벽화들로부터 이 무덤주인공이 고구려왕들가운데서도 가장 신성시되고 숭배되던 왕이라는것을 밝힐수 있었다.

이와 함께 고구려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427년경에 죽은 왕이 없으므로 이곳에 새 왕릉을 만들수 없으며 무덤내부에 당시에 류행되던 인물풍속도가 아니라 상징적인 련꽃무늬벽화가 그려져있다는 사실은 무덤의 주인공이 얼굴모습을 알수 없는 인물 즉 이미 오래전에 죽었고 국가적으로 매우 신성시되던 시조왕이라는것을 밝힐수 있는 과학적인 자료를 얻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체78(1989)년 4월 동명왕릉을 돌아보시면서 김일성종합대학 교원들과 학생들이 무진리에 있는 무덤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조사사업을 진행하였으며 그 과정에 귀중한 유물들을 많이 발굴하였고 이 릉이 동명왕의 무덤이라는것을 과학적으로 확증하였다고 감회깊이 회고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명왕릉발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였고 유적발굴사업과 정리사업을 성과적으로 진행할수 있도록 크나큰 사랑과 배려를 베풀어주시였다.

동명왕릉과 그 부근의 고구려유적들을 조사발굴하고 정리하는 사업은 전적으로 위대한 수령님위대한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최상의 수준에서 완성될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동명왕릉을 동방강국 고구려의 시조왕릉답게 꾸리는 사업에 김일성종합대학 교원, 학생들을 불러주시고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내세워주시였다.

동명왕릉을 과학적으로 고증한데 그치지 말고 고구려시조왕릉답게 훌륭히 개건할데 대하여 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받들고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원, 학생들은 동명왕릉과 그 부근의 고구려유적들을 잘 꾸리기 위한 사업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그 과정에 정릉사우물을 새로 찾아내고 우물안에서 투구, 방패, 보습, 범뼈, 사슴뼈 등 많은 유물들을 찾아내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82(1993)년 5월 16일 새로 개건한 동명왕릉을 돌아보시면서 정릉사우물과 그곳에서 나온 유물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보시고 고구려력사연구에서 성과를 거두었다고 치하해주시고 모든 영광을 동명왕릉의 발굴고증사업에 동원된 력사학자들과 학생들에게 고스란히 안겨주시였다.

동명왕릉과 그 부근의 고구려유적들을 전적으로 맡아 과학적으로 발굴하고 정리하도록 하여주신 위대한 수령님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믿음과 배려에 의하여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원, 학생들은 동명왕릉문제를 과학적으로 해명하고 고구려의 시조왕릉으로 훌륭히 꾸리기 위한 사업에 자신들의 지혜와 정열을 바칠수 있었고 그 과정에 적지 않은 학술적기여를 하게 되였다.

오늘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원, 학생들은 동명왕릉을 발굴하고 정리하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신 위대한 수령님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믿음을 언제나 가슴에 새기고 경애하는 총비서동지의 령도따라 우리 민족의 우수한 문화전통을 더욱 빛내여나가기 위한 사업에 적극 이바지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