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한평생 쓰는 감사의 편지》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 박사 부교수 장명희
 2020.3.2.

해마다 2월 8일 뜻깊은 건군절이 오면 영예군인전쟁로병이며 사회과학원 후보원사인 시아버지의 집은 가족친척들은 물론 찾아오는 사람들로 저녁까지 흥성거린다.

올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올해는 시아버지가 생일 90돐을 맞는 해여서 그런지 여느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로병인 시아버지를 축하해드리였다.

사회과학원 일군들로부터 동사무소 일군들, 평양제1백화점 판매원들과 중학교 학생들…

그날 저녁이였다.

아버지는 책상에 하얀 종이장을 펼쳐놓고 무슨 글을 쓰고있었다.

《아버님, 이젠 년세도 많으신데 무슨 글을 계속 쓰세요?》

이렇게 물으며 나는 쉬실것을 권고하였다.

그러자 시아버지는 《감사편지다! 명절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나를 찾아와 기쁘게 해주는데 고마운 사람들을 소개해달라고 편지를 쓰는 길이다.》라고 하면서 계속 글을 쓰는것이였다.

감사편지! 얼마나 많이 써온 편지던가.

우리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영예군인부부이다.

정말이지 나의 시부모님들은 한평생 고맙다는 감사의 편지를 쓰면서 살아온 영예군인들이다.

17살꽃나이에 전쟁에 참가하여 부상병들을 나르다가 다리에 치명상을 입은 그때에 벌써 시어머니는 생을 포기했었다고 한다.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생명을 담보할수 없는 위급한 처지였지만 그래도 처녀가 다리없이야 어떻게 살아갈수 있겠는가 하는 의사들의 동정심으로 하여 시어머니는 다리를 절단하지 않은채로 척추와 한다리를 못쓰는 영예군인증을 품고 병원문을 나섰다고 한다.

마음속으로는 가정도, 자식도 가져볼수 없는 불구의 몸이며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몸이라는 생각을 품은채 병원문을 나섰던 시어머니였지만 인간사랑의 화원인 이 땅에서 결코 시어머니의 생은 불행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한다리를 절단한 영예군인인 시아버지와 일생을 같이하는 부부가 되여 세자식을 키운 어머니가 되였고 80살이 넘도록 생을 누리고있는것이다.

한번도 사랑하는 자식들을 업어볼수 없는 몸이였지만 탁아소의 보육원들이 세자식을 업어 키웠고 앓으면 동네의 이웃들이 병원으로 업고 달렸다. 나라에서는 그 자식들을 대학공부도 시켜 어엿하게 내세워주었다.

솔직히 영예군인의 가정에 시집을 올 때 나는 걱정이 많았다.

부부영예군인인 시부모를 과연 어떻게 잘 모실수 있을가.

그러나 영예군인의 가정을 돌보는것은 며느리가 아니라 조국의 품이였다.

문밖에도 출입을 할수 없는 시어머니의 생활을 위해 동네사람들은 물론 상점과 병원, 리발소를 비롯한 생활에 필요한 모든것이 어머니를 찾아왔다.

처녀시절에 나는 미처 다 몰랐다. 영예군인들에게 돌려지는 당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고마운것인지.

한번은 시집을 갓 왔을 때 시어머니가 나에게 새 겨울 가죽구두를 주는것이였다.

나는 시어머니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신어보려다가 한쪽신발에 매달린 가죽끈을 보고 이상하여 이 끈은 무슨 끈인가고 물었다.

그때 시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나의 가슴속에 처음으로 영예군인들에 대한 당의 사랑을 알게 해준 계기였다.

전쟁의 포화가 멎고 이 땅에 복구건설이 한창일 때 당에서는 그 어려운 속에서도 영예군인들을 위한 의료기구공장은 물론 영예군인들에게 필요한 필수품을 만드는 공장도 따로 세워주시여 시어머니가 못쓰는 한쪽다리의 발이 점점 작아져 신발이 자꾸 벗겨지는것을 헤아려 끈까지 달아 소포로 보내왔던것이다.

정녕 당의 손길은 어머니가 넘어질세라 잡아주는 손길이였고 앓을세라 이마를 짚어보며 걸음걸음 살펴준 손길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그 사랑의 세계를 그대로 지니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영예군인가정들을 잘 돌봐주도록 온 나라에 조치도 취해주시고 그들의 생활을 돌봐주는 사람들을 온 나라에 내세워주시여 따라배우도록 해주시였다.

어찌 잊을수 있으랴. 해마다 생일은 물론 설명절과 광명성절, 태양절과 전승절에도 찾아오던 이름모를 사람들은 과연 그 얼마였던가.

시어머니의 70돐생일 때에는 온 인민반의 축하속에 구역당일군들이 차려준 생일상을 받아안고 저저마다 딸이 없는 시부모님에게 자기들이 딸이라며 사진을 찍을 때 시부모님들은 자신이 한생 받아온 사랑이 돌이켜져 고마움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어찌 그뿐이랴, 영예군인의 불편한 몸으로 한생 나라의 력사과학발전을 위해 바쳐온 시아버지에게는 80돐 생일상도 보내주신 우리 장군님!

온 인민반, 온 직장사람들의 축복속에 선물상을 받을 때 시부모님들은 목메여 울며 웨쳤다.

《이 고마운 제도가 아니면 이미 이 세상에 없었을 우리들이 오늘은 80돐 생일상까지 받아안았습니다. 어버이장군님 정말 고맙습니다.》

어버이장군님께서는 그뿐이 아니라 부부영예군인이 이 좋은 세월에 더 오래, 더 행복하게 삶을 누리라고 현대적으로 새로 건설된 사랑의 선물집도 배려하여주시였다.

진정 17살 그 나이로부터 장장 반세기 인생의 말년까지 끝이 없는 사랑으로 지켜주고 돌보아주신 그 품이 고마워 시부모님들은 한생 얼마나 많은 감사의 편지를 쓰며 살아왔던가.

아마 그 편지를 쌓으면 사람의 키를 훨씬 넘을것이다.

쓰고 또 써도 그 고마움을 몇백분의 1도 표현할수는 없었지만 시부모님들은 그렇게라도 마음을 쏟아놓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는 크나큰 충동을 받군 하였던것이다.

전쟁에서 피흘려 싸운 영예군인들을 나라의 귀중한 보배로 내세워주시고 온갖 사랑을 다 돌려주시던 우리 수령님들의 대해같은 그 은정을 오늘은 우리의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 그대로 이어가시며 그들의 삶을 빛내주고계신다.

혁명선배들을 존대하는것은 혁명가들의 도덕적의무이라고, 우리는 혁명적의리, 동지적의리를 지니고 혁명선배들을 존대하는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되게 하여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며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전쟁로병들을 평양에 불러다가 전승절을 크게 쇠는것을 해마다 전통화하도록 해주시였다.

자신께서는 전쟁로병들을 도덕의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로 생각하며 귀중히 여긴다고, 그들이 한사람한사람 줄어들 때마다 정말 가슴이 아프다고 하시며 사회적으로 전쟁로병들을 아끼고 잘 대우해주어야 한다고 뜨겁게 강조하시면서 마음을 쓰고 또 쓰고계신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위대한 수령님들께서 빛내여오신 혁명적동지애의 력사를 굳건히 이어 혁명전사들의 생을 후세에 길이 빛내여주시기 위하여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를 세워주시고 전쟁에 참가하여 피흘려 싸운 전쟁참전자 모두를 한품에 안으시는 심정으로 렬사묘를 배경으로 우리 원수님 로병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실 때 로병들은 대를 이어 계승되는 혁명선배들에 대한 그이의 숭고한 도덕의리에 감동되여 격정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조국을 지켜 싸운 전쟁로병들을 금은보화에도 비길수 없는 나라의 보배로 존중하고 내세워주시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숭고한 도덕의리심을 따라 오늘 온 나라에는 전쟁로병, 전시공로자, 영예군인들을 존경하고 우대해주며 혁명선배들의 숭고한 정신세계를 따라배우는 운동이 계속 힘있게 벌어지고있다.

바로 그 사랑의 해빛이 60여년동안 우리 가정에 변함이 없이 흘러들어 우리 시부모님들은 감사의 편지를 오늘도 계속 쓰고있는것이 아닌가.

그렇다. 우리 시부모님들이 쓰고 쓰는 그 감사의 편지에 다 어려있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한평생 가꾸어오시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대를 이어 빛내여가시는 인간사랑의 화원, 내 조국의 참다운 모습이.

그리고 온 나라가 덕과 정으로 굳게 뭉쳐 경애하는 원수님의 령도따라 오늘의 겹쳐드는 모든 난관을 함께 이겨내며 이 땅우에 반드시 일떠세우고야말 사회주의강국의 밝은 래일이…